별어곡역/ 도원읍 별어곡역 -도원읍 전윤호 관 속에 누웠다 깬 밤이면 돌아가고 싶다 뒤통수나 잘 치는 강 하류배들과 싸우다 지친 귓전에 젖은 디젤 기관차 소리 밤 두 시 별어곡역에 내려 민둥산을 올라가리라 키보다 높은 억새들이 별빛도 가린 밤 내가 아직 나라면 무릉약수에서 한 번만 쉬고 입구를 찾을 것이다 돈..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4.23
간집계(刊集戒)/ 임광택 간집계(刊集戒) 임광택(생몰연대 미상, 19세기 위항시인) 시 몇 편 이루는 것이야(詩篇縱有成) 글한다는 사람들의 한 잔재간이거늘(文人一小技) 생전에 읊조리며 즐기던 것들(生前供吟弄) 사후에 불살라 버린들 어떠리(事後任棄燬) 더욱이 잔재간도 없는 자들이면(尤況下此者) 그 진부함이 시궁창 같으..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4.04
지구에서 1cm 떨어진 사내/ 윤영숙 지구에서 1cm 떨어진 사내 윤영숙 신문 한 뭉치 옆구리에 끼고 몇 걸음 앞서 돌계단 오르는 저 사내 구두 뒤꿈치가 움푹 파였다 한 계단 두 계단 발걸음 옮길 때마다 제 살 깎아내느라 힘깨나 쏟았을 구두 뒷바닥, 허방이 체중을 받아 안는다 어느 광포한 이빨에 뜯겼을까 1cm 들린 채 떠가고 있다 구두는..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3.27
부활/ 나금숙 부활 나금숙 그 산을 넘어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키를 넘는 풀숲을 헤치고 그 무덤가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몰래 고인 물줄기가 불쑥 발을 적시는 산길을, 호랑나비도 겨운 날개를 접고 손톱만한 칡꽃 위에 쉬는데 허위허위 단내 나는 숨 내쉬며 백골로 누운 당신 보러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더듬어도 ..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3.24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까?/ 맹문재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까? 맹문재 나는 여전히 서점에서 혁명의 책들을 골라오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재미를 들여서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몰두해서도 아니다 나는 화투에 중독된 노름꾼처럼 시간을 뒤적이느라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빠진 나는 시..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3.12
삼신할머니/ 송은영 삼신할머니 송은영 시간과 날짜는 묻지 않고 요일만 묻는 할머니가 있지요 첩첩산중 텃밭에 넌출넌출 자라는 오이 가꾸기만 할 뿐 자식 생각에 손도 대지 않고요 반질반질한 지팡이 허리 삼아 손수 밥을 짓고 빨래를 하지요 한때 남편과 자식들로 들뜬 기억 들키기 싫은지 할아버지와 자식 얘기만 나..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1.24
새/ 장종권 새 장종권 연변대학 교정에 우두커니 앉아있으려니 새 한 마리 날아와 속삭입니다. 일어나라, 이제 집에 가자.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천 구월동 내 집 앞 나뭇가지에서 매일 속삭이던 녀석이었습니다. 모습도 똑같았고, 속삭이는 말도 똑같았습니다. 녀석이 나를 따라 서해바다를 건너고 만주벌판을 가..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1.23
언제나없이/ 남태식 언제나없이 남태식 언제나없이 꿈은 무덤에서 이루어진다 무덤이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진다 우리가 남이가 얼굴이 없는 짝퉁 우리가 손을 내민다 살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 주먹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 저 주먹을 본 적이 있다 저 주먹과 거래를 한 적이 있다 그 거래는 무엇이었나 뒷짐을 지고 한 ..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1.22
안녕, 누렁이/ 이신 안녕, 누렁이 이신 성도 없이 변변한 이름도 없이 ‘누렁이’로 살아온 녀석이 밥 외엔 무엇을 알까만 개라는 이름표를 떼는 날 간밤 어떤 꿈에 다녀왔는지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떤다 마지막 밥을 먹고 있는 십만 원짜리 녀석의 정수리가 쥐면 부서질 두부 같다 새 주인이 잡고 있는 운..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1.21
오래된 사랑/ 박수현 오래된 사랑 박수현 반달이 골목 끝을 가로막던 밤이었다 그가 줄장미 번져 오른 담벼락으로 갑자기 나를 밀어부쳤다 블록담의 까슬함이 등을 파고들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첫 키스의 기억, 사랑이란 그렇게 모래 알갱이 같은 까슬한 감각을 몸속에 지니는 것 줄장미가 벙글어 붉은 꽃을 피울 때마..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1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