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 심장
정영숙
잘 익은 수박은 정수리에 칼끝을 대자마자
저절로 두 쪽으로 짝 갈라진다
단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붉은 심장을 드러낸다
잘 익은 사랑은 이별할 때
정수리를 찌르는 서늘한 칼날을 예감하고
칼날이 심장에 닿기 전 잡았던 손을 재빨리 놓는다
신이 선물로 주신 초록의 신성한 움막에서
살과 살이 부딪쳐 어둠으로 불꽃을 피웠으니
꿀이 흐르는 낙원에서는 더 이상 피울 꽃이 없었으니
앞에 놓인 건 뛰어내릴 절벽 뿐
둘로 쪼개지기 전 그들은
어떤 사랑도 한 사람의 몫은 이분의 일*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절벽 위에 손잡고 서서
절벽 아래로 함께 뛰어내리고자 했을 때
뛰어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번개처럼 정수리를 치던 서늘한 칼날의 예감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라고
심장에 칼금 하나 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정수리에 닿던 싸늘한 칼날의 감촉을 애써 지우며
불타던 반쪽 심장을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서는데
반만 남은 심장에 쓱 칼금을 긋고 가는
저 초록의 둥근 수박
-전문(158-159)
---------------------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현대시학사> 펴냄
* 정영숙/ 1993년 시집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볼레로, 장미빛 문장』『황금 서랍 읽는 법』『옹딘느의 집』 등 8권, 활판시선집『아무르, 완전한 사랑』, 명화 산문집『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라는 귀신고래/ 한이나 (0) | 2024.06.26 |
---|---|
와각지쟁(蝸角之爭)/ 최도선 (0) | 2024.06.24 |
아케론의 강/ 이미산 (0) | 2024.05.27 |
곤줄박이 코드/ 이명 (0) | 2024.05.26 |
뛰어라, 반가사유/ 윤경재 (0) | 2024.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