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반쪽 심장/ 정영숙

검지 정숙자 2024. 5. 28. 00:46

 

    반쪽 심장

 

     정영숙

 

 

  잘 익은 수박은 정수리에 칼끝을 대자마자

  저절로 두 쪽으로 짝 갈라진다

  단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붉은 심장을 드러낸다

 

  잘 익은 사랑은 이별할 때

  정수리를 찌르는 서늘한 칼날을 예감하고

  칼날이 심장에 닿기 전 잡았던 손을 재빨리 놓는다

 

  신이 선물로 주신 초록의 신성한 움막에서

  살과 살이 부딪쳐 어둠으로 불꽃을 피웠으니

  꿀이 흐르는 낙원에서는 더 이상 피울 꽃이 없었으니

  앞에 놓인 건 뛰어내릴 절벽  뿐

 

  둘로 쪼개지기 전 그들은

  어떤 사랑도 한 사람의 몫은 이분의 일*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절벽 위에 손잡고 서서

  절벽 아래로 함께 뛰어내리고자 했을 때

  뛰어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번개처럼 정수리를 치던 서늘한 칼날의 예감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라고

 

  심장에 칼금 하나 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정수리에 닿던 싸늘한 칼날의 감촉을 애써 지우며 

  불타던 반쪽 심장을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서는데

 

  반만 남은 심장에 쓱 칼금을 긋고 가는

  저 초록의 둥근 수박

     -전문(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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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현대시학사> 펴냄

  * 정영숙/ 1993년 시집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볼레로, 장미빛 문장』『황금 서랍 읽는 법』『옹딘느의 집』 등 8권, 활판시선집『아무르, 완전한 사랑』, 명화 산문집『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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