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샘/ 신원철

샘      신원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히말라야 깊은 산속 가릉빈가 새  청청 수려하다는 그 목청.  강화도 보문사 사시예불, 독경하는 젊은 스님의  샘물 같은 목소리가 꼭 그랬지요  그때 나는 대웅전 앞 큰 느티나무 아래 벌렁 드러누워  "아이고 이놈의 절 올라오는 언덕길이 장난 아니네!"  투덜대면서  팔락팔락 나부끼는 잎사귀 사이로  슬쩍슬쩍 엿보이는 흰 구름에게 그 마음을  가만히 내맡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저쪽 처마들이 댕그렁 댕그렁  한 소리 시작하는 거예요  스님도  목탁을 놓고 요령을 흔들기 시작했어요  쨍그렁쨍, 댕그렁댕, 쨍쨍, 댕댕······  이 소리 저 소리 한가운데서  나무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지요  이렇게 수선스러운 절집은 처음이었지만  마음은 퐁퐁 솟아오르고 ..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달리는 소리에 계곡은 늘 깨어있고  앉기 편한 돌을 골라 발 담근 내가  소리 내며 달리는 투명한 물살을 들여다본다   불룩하거나 움푹 파이는 물의 굴곡은  정교한 사슬의 톱니들 같다   무수한 초침들로 분주한 도시의 하루  되돌릴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소스라치듯 욕망의 트랙을 달려간 바퀴들은  모두 어디에 가있을까   서늘한 그늘 좇아 자리를 바꾸는 내가  초침에서 분침으로 느슨해진다  나무처럼 하늘 향해 귀를 세우고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지금  비로소 시간 밖으로 나온 것 같다   떨어진 잎이 뜬구름 위를 천천히 맴돈다  달려간 이들이 닿은 피안이 저곳 같아서  이쪽과 저쪽의 거리를 가늠하는 동안   미늘에 물려 기울어지는..

이름 名/ 노혜봉

이름 名      노혜봉    캄캄할수록 가득 차 하늘꽃이라 불러본다  아버지 얼굴 흐릿해 불화살 맞은 해바라기꽃이라 부른다  멍들어 가슴에 새긴 혈흔, 도장꽃이라 써 본다   나 죽으면 불러줄 이 없는 그 이름 실컷 불러본다  하루아침 훌쩍 지구의 회전문이 열려져, 그 옛날  우주로 출타하신 이후, 아무도 아버지 성함  써 드린 일 없는 노용석盧龍錫, 그 이름,   문갑 서랍을 열고 상자 속에 고이 모셔 둔  아버지 상아도장을 꺼내, 오랜만에 문질러 본다  싸늘한 돋을새김에 소름 살아 오르듯 촉촉한 체온  시집와서 생신날 제삿날 까맣게 잊고 못 챙겨 드린 일  밀린 참회록 내리 써 놓으면 꽃도장으로 지워 주실까   곤히 잠들어 있는 어머니 눅눅한 그늘 곁  가족관계증명서에 아버지 검지손톱 담뱃진 맡듯이..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궁금하다  돌을 건져 올려 어떻게 미역을 만드는지  푸른 물결을 어찌 통째로 치마폭에 담아올 수 있었는지  오늘 무슨 날이기에  남해바다가 가지미와 조개를 앞세우고  아침부터 뜨겁게 이곳에 들렀는지  단돈 오천 원에 돌미역국이 다 나오는지   영미야, 생일 축하해     -전문(p. 58)  ---------------------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비둘기 경제학』등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교실 창가에 기대어 흰 운동장 너머  바라보면 남해바다 한쪽이 정답다  바다가 있는 교실 풍경  몇 걸음 내달리면 닿을 아름다운 거리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나는 꿈의 바다 대신  상춧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 되었다  들판에 들꽃 지천인 봄날 때 씻긴다고  우루루 줄지어 아이들 냇가로 몰고  지루해진 오후, 냉이꽃과 싸리나무와 종달새  그리려 자주 언덕에 올랐다   뽀뽀한다고 달겨들던 코찔찔이 1학년 철이랑  가난해도 의젓했던 화전민 반장 준이는  너른 세상바다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다시  씀바귀 잎 같은 선생 노릇이나 해 볼까  이층 바다 교실 창가에서, 우두망찰  바다를 ..

유목의 시간/ 최도선

유목의 시간      최도선    정오에 붉은 사막을 걷는 낙타들,  바람에 몰려다니는 모래가  각을 이루거나 언덕을 이루거나  대양을 향해 출항하는 배처럼  묵묵히 걸으며 자연에 대항하지 않는다   모래바다는 적색거성의 성채 활활 타오르고  소소초를 씹으며 태양을 향해 침 흘리며  이정표 없는 길을 가는 낙타들  제 그림자 칼날 능선 위에 남긴다   미라가 된 나무 곁에 서서  뒤처져 오는 낙타를 보며  어릴 적 달리기할 때 늘 뒤처지던 내 모습 떠올리며  마음 한 조각 모래 속에 묻는다  그곳엔 내 영혼도 들끓었던 옛날이 있었나 보다   붉은 사막  그 위에 파란 하늘  어둠과 함께 추워진 밤  태고 같은  고요   낙타는 가던 길 멈추지 않는다    -전문(p. 34-35)    * 블로그 주: 위..

도라산 역/ 최금녀

도라산 역      최금녀    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밭 사이로 마중을 나오는 팻말, 파주 도라산 역······   도라산 역은 내 마음속 맞춤 가락  '돌아가는 고향역'의 은어   들꽃이 필 때, 흰 눈이 날릴 때, 망향제단에 절 올리고  렌즈의 각도를 맞추고, 그 너머를 보고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정거장 지나면 함흥이고  한 정거장 지나면······ 고흥이고, 사리원이고, 북청이다  귀가 닳았다  애가 닳았다   세상 모르게 잠이 든  도라산 기차역을 지날 때마다  나 당장이라도  운전석을 차고 앉아  북녘으로 머리를 돌려  200, 300킬로로 냅다 달려가고 싶다  천 만의 한숨으로 낡아가는  저 팻말들 하나하나 껴안고  울고 싶은  자유로야!  파주야!  도라산 역아!  ..

눈물/ 문화빈

눈물 문화빈 꼭 껴안아주세요 동요 가득한 입술에 일렁이던 파도 나는 당신을 일그러지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친 열망 달콤하고 모호했던 화학작용 시원한 눈매, 아름다운 턱 선이 밑면에 닿는다 맥주 거품처럼 무서운 속도로 허물어지는 당신, 보이지 않는 이마를 잡는다 하얀 거품이 내 몸속으로 침투된다 나는 모든 하루로부터 소외된다 -전문(p. 137)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상흔(傷痕)/ 나채형

상흔傷痕 나채형 기생 논개제가 있던 음력 9월 9일 외삼촌댁 워리가 생을 마쳤다 그날 한 사춘기 소녀의 왼팔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열다섯 어린 소녀는 마당에 걸린 불구덩 화덕 옆에 셋째 동생과 막내 동생이 쪼그려 앉아있는 헛것이 보여 조바심 들었다. 행주를 든 양손은 용광로를 들고 정지 문턱을 넘어서 바닥에 놓는 순간 얇은 먼지 합판에 걸려 넘어졌다. 앗! 뜨거워! 비명과 함께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걷어 올린 나일론 옷소매 시뻘건 기름덩이 살가죽은 훌러덩 벗겨지고 일그러졌다 찢어지는 절규의 비명에 뛰어나온 집주인아주머니 품에 털썩 안겨 시집 못 가면 어떡해요? 悲嘆의 눈물을 흘린 철부지 "괜찮아 시집 갈 수 있어 오늘 니가 쎠댔구만!"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하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장..

마라톤/ 김충래

마라톤 김충래 창공에 큰 고래 한 마리 날고 뱃고동 축포처럼 울리면 오색 갈매기 일제히 공중부양 환호성이다 청어, 고등어, 꽁치 떼 지어 파도타기 하며 썰물처럼 빠지면 아직은 준치랴 우기며 휩쓸린다 줄지어, 무리 지어 순행과 역행을 즐기다 홀로 파도와 맞선다 가끔 물 위로 솟구쳐 거칠게 찬물 내뿜는다 향고래 먹은 청어 웃으며 들어오고 만세 부르며 고등어 골인하고 상어한테 지느러미 공격당한 꽁치 절룩거리며 결승선 통과한다 밀물이 되어 밀려온다 썩지 않는 준치 되려 나아간 그 세월에 꼬리지느러미가 잡힌 채 휘청거리며 들어온다 살아있다는 것은 가끔 자기 몸을 꼬리로 한번 세워보는 것이다 그래도 준치는 눈동자에 고래 한 마리 키우며 먼 곳 바라본다 -전문(p. 117) --------------- * 군산시인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