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7

김지율 연구서『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 허수경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허수경(1964-2018, 54세)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모두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밤별에는 집이 없어요  구름 무지개 꽃잎에는 우리의  집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간  집에는 살 수 없는 것  세월이 가슴에 깊은 웅덩이로 엉겨 있듯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불행한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아 불행한 세대가  세월의 깃을 재우는 일조차 다른 것  그래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배고픈 어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땅을 가로질러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함께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아버지 나는 갑니다  모두의 집을 찾아 칼을 들고  눈을 재우며     -전문-   ▶타향의 도시 '서울'    욕망이나..

김지율 연구서『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신화의 계절 : 김춘수

신화의 계절 김춘수(1922-2004, 82세) 간밤에 단비 촉촉이 내리더니, 예저기서 풀덤불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가지마다 나뭇잎은 물방울 흩뿌리며, 시새워 솟아나고, 점점點點이 진달래 진달래가 붉게 피고, 흙 속에서 바윗틈에서, 또는 가시 덩굴을 헤치고, 혹은 담장이 사이에서도 어제는 보지 못한 어리디어린 짐승들이 연방 기어나고 뛰어나오고······ 태고연히 기지개를 하며 신이 다시 몸부림을 치는데, 어느 마을에는 배꽃이 훈훈히 풍기고, 휘녕청 휘어진 버들가지 위에는, 몇 포기 엉기어 꽃 같은 구름이 서西으로 흐르고 있었다 -전문- ▶ 신화적인 자연 공간과 원형의 헤테로토피아(발췌) _김지율/ 시인 · 문학평론가 이 시의 장소는 단비가 내리고 진달래가 피어 있으며 어린 짐승들이 담장 사이로 뛰어나올 ..

김영범 평론집『증상의 시학』/ 서산의 용비지(龍飛池) : 박희진

서산의 용비지龍飛池 박희진(1931-2015, 84) 충남 서산에 용비지라는 큰 저수지 있는데요. 하늘 나는 용의 모습도 비친다는 뜻일까요? 작은 섬 위엔 아름다운 정자도 있어요. 하늘 · 땅 · 사람의 절묘한 조화 보고 싶거든 이곳에 오세요. -전문- ▶ '우리'라는 감각 혹은 세계수/ 영원의 순간들, 박희진의 『니르바나의 바다』(발췌)_김영범/ 문학평론가 박희진이 실험했던 다양한 단형시, 이른바 '4행시'의 하나이다. 시가 그려 낸 것은 저수지에 조성한 인공섬과 거기에 세운 정자이다. 그러나 풍경이 완성되는 것은 수면에 비친 하늘과 땅에 사람이 더해지면서이다. 한데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가 어우러진 이 경관이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해답은 저수지가 품고 있는 것이 우주라는 데에서 ..

김영범 평론집『증상의 시학』/ 우도 : 이영광

우도 이영광 이렇게 먼 곳까지 함께 왔다 안개는 짙어 일출은 물 밑으로 오고, 장닭처럼 오래 무적霧笛이 울었다 산정의 등대에는 모자 쓴 마네킹 등대지기가 사람 눈보다 더 까만 눈으로 먼 바다를 투시하고 있었다 뒤편 기슭, 야외 등대 박물관에는 갓 태어난 새끼 등대들이 여기저기 웅크린 채 자라고 있었다 알집 벽에 빼곡히 매달린 크고 작은 알처럼 그리고, 섬의 절반은 목장이었다 우리는 사라지면서 걸어갔다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말들이 나타나 조용히 스쳐 지나가거나 다가와 순한 눈을 껌벅거렸다 간밤 당신 몸에 혹, 아기가 들지 않았냐는 듯이 -전문- ▶ '증상'의 시학/ 이영광론_아날로지와 알레고리를 횡단하는 시(발췌)_김영범/ 문학평론가 이영광에게 사랑에 대한 시는그렇게 많지 않다. 위의 시는 몇 편 되지 않..

김남호 평론집『깊고 푸른 고백』/ 마르지 않는 이유 : 변종태

마르지 않는 이유 변종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돌아온다고 했다 긴 골목은 축축하고 가로등은 꺼져 있다 드레스 한 장만 사고 돌아온다는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이프로 사람 죽여봤어요? 나이프는 살인도구가 아니야 어떤 색을 골라드릴까요? 파랑 물감을 덧바르면 인생이 바뀔 거예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나이프를 씻어둬야지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서 새처럼 울어봐 지저귀라구 날아가는 새의 발톱에 밑줄을 그어줘 빨강 루즈로 진하게 밑줄을 그은 다음 새처럼 울어줘 물감을 짜기 전에 뭘 그릴지를 먼저 결정하라고 도대체 그림은 언제 그리는 거야 창가에 앉아보라니까 지저귀라니까 새 울음소리를 그릴 거야 새는 무슨 색으로 울지 네가 떠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물감이 마르지 않아 십 년에 십 년이 지나도록 새가 울지 않아 ..

김남호 평론집『깊고 푸른 고백』/ 빨간색 효력 : 김상미

빨간색 효력 김상미 한 여자가 지나간다. 빨간색 마스크를 쓰고 빨간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빨간색 하이힐을 신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멋쟁이는 여전히 멋쟁이.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빨간색의 강렬한 효력에 후뇌가 반짝반짝. 그 여자의 뒤 끝에 후광을 만든다. 아, 오랜만에 맛보는 빨간색의 신선한 자극. 한순간에 코로나블루가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아, 이래서 바그너는 언제나 빨간색 방에서만 교향곡을 작곡했구나. 올 내내 코로나블루로 심장박동 수가 최저로 내려갔으니 바그너 같은 집중 강력함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산타클로스 같은 즐거운 활기가 내게도 필요할 테니 인사동 나온 김에 한지지업사에 들어가 빨간색 종이를 산다. 방 한쪽만이라도 빨간색으로 도배해 잃고 있던 원초적 본능, 식욕성욕활력창작욕..

오민석 평론집『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자작나무 숲 : 김정수

자작나무 숲 김정수 껍질을 벗기며 하얗게 우는 나무가 있지 인제와 원통의 강폭만큼 너른 숲은 속울음 같은 길들 감추고 있지 애를 업으면 길은 가파른 비탈을 펼쳐 젖은 등을 흘리지 발이 자꾸 미끄러지는 숲은 높은 곳에서 하늘을 보여 주지 반짝 흔들리지 구름과 구름 사이, 꽃을 따다 들킨 손은 언덕 너머 두고 온 집을 그리는 중독이지 연緣을 끊지 못하는 손금이지 전생의 상처 간직한 거미의 착각이지 마음 깊이 쑤셔댈 수 있는 가시 하나, 극소량의 독을 꽃나무에 들이지 평생 꽃을 떠나지 못하는 벌은 빨강으로부터 길을 훔치는 중이지 꽃 마중은 슬픈 착각, 렌즈에 갇힌 망각인 셈이지 한껏 팽창된 불편이 비탈에서 비를 뿌리지 젖은 삶이 흉터를 보여주는 것도 순간, 갓 태어난 고비가 지천이지 오래오래 가슴에 머물던 비..

오민석 평론집『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7월의 공간을 숨쉬기 : 트란스트뢰메르

7월의 공간을 숨쉬기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스웨덴, Thomas Transtromer 1931-2015, 84세) 거대한 나무들 아래 등을 대고 누워 있는 사람은 또한 그 나무들 속에 올라가 있다. 그는 수많은 작은 가지들 속으로 가지를 뻗는다. 그는 앞뒤로 흔들리며, 천천히 돌진하는 투석기投石機 의자 안에 앉는다. 부두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눈을 그 아래 물에 단단히 고정한다. 부두들은 인간들보다 더 빨리 늙는다. 그것들은 뱃속에 은회색의 기둥들과 바위들을 가지고 있다. 현란한 빛이 그대로 밀고 들어온다. 온종일 갑판이 없는 작은 배에서 보낸 사람은 빛나는 만灣들 위에서 움직이다가 마침내 자신의 푸른 램프 그늘 안에서 잠들 것이다 마치 섬들이 거대한 나방들처럼 지구 위에서 기어 다니듯. -전문(..

금시아_시평집『안개는 사람을 닮았다』/ 춘천을 생각하며 : 이승훈

춘천을 생각하며 이승훈(1942-2018, 76세) 속물이 다 된 내가 대견하다 오오 고맙고 고맙다 오늘 저녁에도 고맙다 내가 춘천에 산다면 이런 저녁이면 안개 속을 헤매리라 춘천엔 안개가 있고 춘천은 춥고 난 황량한 석사동에서 겨울저녁이면 버스를 타고 싯벌건 노을을 향해 떠나리라 춘천은 내 고향 그러나 한 번도 따뜻하지 않았다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문제다 어린 시절 가정 문제고 젊은 시절 내면 문제고 30대에 나를 휩쓸고 간 안개 같던 여자 문제지만 개인 문제를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건 피해야 한다 오늘도 가을이다 흐린 가을 언제나 춘천은 흐린 가을 여자 문제로 아내와 싸운 것도 흐린 가을 둑길에서다 춘천에서 나는 정신의 한량, 추억의 백수, 어두운 시를 쓰던 우수의 건달, ..

금시아_시평집『안개는 사람을 닮았다』/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서 : 박남철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서 박남철(1953-2014, 61세)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안개에 아련히 젖은 황금의 햇빛이 그 사이로 내리쪼이는 춘천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녹음은 무성하고 캠프 페이지는 고요하다. 벤자민나무는 푸른 분 속에 서서 벌거벗은 채로 카페트 위에 깐 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다. 오늘은 6월 7일---시간 강사의 일도 작파해버렸다. 다만 이렇게 고요히 앉아 춘천 시가지 사이의 캠프 페이지 사이의 녹음을 멀리 동양화로 젖어 있는 산줄기들을 바라다 볼 뿐이다.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낮게 깔린 시가지를 내려다 볼 뿐이다. 시간도 인환도 없이 6층 아래 내 배경에서는 7층 석탑이 서 있으리라. -전문(p. 50), 『창작과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