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김남호 평론집『깊고 푸른 고백』/ 빨간색 효력 : 김상미

검지 정숙자 2023. 1. 20. 01:53

 

    빨간색 효력

 

    김상미

 

 

  한 여자가 지나간다. 빨간색 마스크를 쓰고 빨간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빨간색 하이힐을 신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멋쟁이는 여전히 멋쟁이.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빨간색의 강렬한 효력에 후뇌가 반짝반짝. 그 여자의 뒤 끝에 후광을 만든다. 아, 오랜만에 맛보는 빨간색의 신선한 자극. 한순간에 코로나블루가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아, 이래서 바그너는 언제나 빨간색 방에서만 교향곡을 작곡했구나. 올 내내 코로나블루로 심장박동 수가 최저로 내려갔으니 바그너 같은 집중 강력함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산타클로스 같은 즐거운 활기가 내게도 필요할 테니 인사동 나온 김에 한지지업사에 들어가 빨간색 종이를 산다. 방 한쪽만이라도 빨간색으로 도배해 잃고 있던 원초적 본능, 식욕성욕활력창작욕 모두를 되찾자. 빨간색 마스크를 쓰고 빨간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빨간색 하이힐을 신고 당당히 거리를 활보할 나이는 한참 지났지만.

   -전문, 『시인시대』(2020-겨울호)

 

  ▶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발췌)_김남호/ 문학평론가 · 시인

  어떤가? 갑자기 눈앞이 빨간 색으로 환해지는 것 같지 않은가? 한때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빨간 색은 금기의 색깔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 시는 그  빨간 색으로 생의 활기를 증명하고 견인한다. 온통 빨간 색으로 자신을 표현한 여자로 인해 화자도 금세 그 활기에 전염되어 지업사에 들어가 빨간 색 벽지를 사고 만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 속도도 무섭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당당함으로 거리의 시선을 낚아채듯이, 김상미 시인은 직설적인 표현과 거침없는 태도로 독자의 시선을 낚아챈다. 그의 언어는 에두르는 법이 없다. 그래서 군살처럼 처지는 시를 못 견딘다. 이러한 기질과 태도로 인해 여전히 그에겐 빨간 색이 어울리고 그의 언어는 반짝인다.

  젊어서 젊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젊은 시를 쓰기 때문에 젊어지는 거다. 한때 우리 시는 서둘러 늙었던 적이 있다.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깨달은 포즈로 멀찍이 나앉은 모습을 시인답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를 젊게 하는 것은 생각의 젊음이고, 생각의 젊음은 생각의 가벼움에서 온다. 그리고 생각의 가벼움은 언어의 가벼움으로 획득될 것이다. 왜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때 빨간 색을 그토록 두려워했겠는가? 거기에는 불온한 에너지가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시의 생명력은 바로 저 빨간 색의 불온한 이미지에서 온다. (p. 시 59-60/ 론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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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호 평론집 『깊고 푸른 고백』에서/ 2022. 10. 15. <북인> 펴냄   

  * 김남호 金南鎬/ 경남 하동 출생, 2002년 계간 『현대시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5년 계간 『시작』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링 위의 돼지』『고래의 편두통』『두근거리는 북쪽』, 디카시집『고단한 잠』, 평론집『불통으로 소통하기』.  형평지역문학상, 디카시작품상 수상. 현) 박경리문학관 & 이병주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