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7

김효숙_문학평론집『눈물 없는 얼굴』/ 재봉틀과 오븐 : 박연준

재봉틀과 오븐 박연준 늙는다는 건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일 모퉁이에서 빵 냄새가 피어오르는데 빵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다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기억이 사라진다 신발을 벗고 아래로 내려오면 등을 둥글게 말고 죽은 시간 속으로 처박히는 얼굴 할머니가 죽은 게 사월이었나, 사월 그리고 사 월 물어볼 사람이 없다 당신과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죽은 것보다 멀리 있다 사랑을 위해선 힘이 필요해, 라고 말한 사람은 여기에 없다 만우절에 죽었다 그의 등, 얼굴,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과 늙음과 슬픔 셋 중 무엇이 힘이 셀까 저울로 들고 오는데 힘은 무게가 아니다 힘은 들어볼 수 없다 재봉틀 앞에 앉아 있고 싶다 무엇도 꿰매지 않으면서 누가 빵을 사러 가..

김효숙_문학평론집『눈물 없는 얼굴』/ 그리고 사물인터넷 2 : 문정영

그리고 사물인터넷 2 문정영 사물이 감성을 키우게 되었지 몽상가의 제스처처럼 나는 우는 새소리를 눈으로 듣고 너는 목소리가 젖어 눈물이 난다 했지 눈물샘이 말라 내 눈동자는 그간 눈에 담아둔 슬픔을 풀어서 먹지 틀에 가둔 것들이 동어반복의 내 사랑법이라서 사물이 되어버린 눈은 나의 발성을 듣지 못하지 빈자리를 자동으로 감지하는 영화관의 센서같이 사랑도 사물처럼 망막의 감정을 읽을 뿐이지 -시집, 『두 번째 농담』(2021, 시산맥사) 전문 ▶ 전능과 불사(immortal), 그리고 눈물 없는 눈(발췌)_김효숙/ 문학평론가 계량할 수 없는 감정이 들붙는 망막이 여기에 있다. 눈물의 양으로 가늠해보고 싶은 누군가의 기쁨 · 슬픔의 크기, 금방이라도 살갗 위로 흘러내릴 물기가 담긴 눈동자는 여기에 없다. 사물..

이찬_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 무화과 : 김지하

무화과 김지하(1941-2022, 81세)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전문- ◈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前) 왕가위 영화와 시 읽기의 즐거움(부분) "모용언/모용연"이라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의 페르소나가 불러들이는우리 현대시의 작품 역시 특정 시대의 상황이나 제한된 역사적 국면을 넘어서, 좀 더 보편적인 존재론의 차원에서 타인과 세계로..

이찬_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 사랑 : 김수영

사랑 김수영(1921-1968, 47세) 어둠 속에서도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전문/ 『김수영 전집 1: 시』, 민음사, 2018. 185쪽 ◈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後) 왕가위 영화와 시 읽기의 즐거움(부분) 우리는 왕가위의 영화 의 "홍칠"이란 인물을 김수영 시 「긍지의 날」과 겹쳐 읽으면서, 그를 "긍지"의 주체이자 니체의 운명애의 주인공으로 새롭게 호명했다. 또한 『주역』의 일부를 구성하는 산택손 괘와 풍뢰익 괘에 대한 정이천 주석의 "순환"의 의미를 살피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사상사적 맥락 전반을 가로지르는 극력極力의 역동적 상호 작용,..

이경교_시창작강의『푸르른 정원』「꽃사태」

꽃사태 이경교 지상의 모든 무게들이 수평을 잃기 전, 다만 햇빛이 한번 반짝하고 빛났다 저 꽃들은 스스로 제 안의 빛을 견디지 못하여 그 光度를 밖으로 떼밀어 내려는 것 야금야금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스스로 빛의 적층을 이루던, 빛도 쌓이면 스스로 퇴화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 도대체 누가 그 붉은 암호를 해독했을까 이웃한 잔가지 한번 몸을 떨 때마다 일제히 안쪽의 문을 두드려 보며 더운 열꽃처럼 스스로 제 체온을 덜어내려는 꽃들의 이마 위엔 얼음주머니가 얹혀있다 체온의 눈금이 떨어질 때마다 연분홍 살 속에 꽂혀 있던 눈빛들은 다시 컴컴한 안으로 되돌아 가야한다 몸을 흔들어 수평을 허무는 꽃들이 어두운 고요 속에 일제히 틀어박힐 때 문을 닫기 전, 다만 햇빛이 한번 반짝하고 빛난다 -전문- ▣ 아주 새로운 ..

이경교_시창작강의『푸르른 정원』/ 맨발 : 문태준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 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

이정현_평론집『60년대 시인 깊이 읽기』/ 창호지 : 민용태

창호지 민용태 우리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것은 이 얇다란 종이 하나 북풍이 칼날을 휘둘러도 우리는 이 창호지 하나를 방패로 겨울을 난다 구름의 포를 뜬 창호지는 그러나 작은 바람결에도 곧잘 약하게 운다 실은 창호지는 눈물에 약하다 작은 눈물바람에도 가슴이 허문다 푸른 하늘에 연이 되고 싶었을까 고명한 선비의 붓 끝에 영생을 얻고 싶었을까 창호지는 연한 풀잎의 힘줄이 드러나 보인다 갈기갈기 찢기울지언정 부서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상여 위에 꽃으로 필지언정 그 자리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깃발이 되어 펄럭이며 소리치는 실은 대기의 사촌쯤 되는 우리네 하얀 마음 너와 나의 등불을 지키는 것도 실은 이 얇다란 창호지 하나다. -전문- ▶사랑의 돈 끼호떼, 시인 민용태 이야기/ 1968년 『창작..

이정현_평론집『60년대 시인 깊이 읽기』/ 점멸- 심우도 : 박제천

점멸 심우도 박제천 오늘밤 별 하나 이 땅으로 달려오는 걸 보았다 몇 광년의 길을 혼자서 달려온 별, 그리고는 다 불붙어 타버린 운석 하나로 이 땅에 살기로 한 별, 별들도 더이상 참을 수 없기에 온몸에 불이 붙더라도 그리운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개똥밭에 참외로 뒹굴더라도 이승으로 건너오는 것이다 불이 붙어 다 타버린 영혼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돌이 된 별은 1억년이 걸리더라도 제 짝만 찾으면 다시 별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이다 붕새가 물고기였다가 새가 되어 북명에서 남명으로 옮기듯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오늘밤 저 별이 하염없이 달려오며 보여주는 점멸의 불빛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전문- ▶방산芳山 박제천 선생님을 만나다/ 1966년 『현대문학』 등단(발췌)_ 이정현/ 시인 ..

김유섭_평론서『한국 현대시 해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12-1996, 84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을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전문-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발표된 것은 1938년이다. 이때..

김유섭_평론서『한국 현대시 해석』/ 진달래꽃 : 김소월

진달래꽃 김소월(1902~1934, 32세)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전문- ▣ 김소월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다. 1907년 할아버지가 독서당을 개설하고 훈장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1909년 남산 소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오산 중학에 입학해서 스승 김억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1916년 홍단실과 결혼했고,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그리워」「춘강」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출생과 시집 『진달래꽃』 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