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7

이현승_『얼굴의 탄생』(발췌)/ 황혼 : 오장환

황혼 오장환(1918-1951, 33세) 직업 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무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알로 깔리어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긴 그림자는 군중의 대하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dl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이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나는 공복의 눈을 떠, 희미한 路燈을 본다. 띠어띠엄 서 있는 포도 우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

이현승_『얼굴의 탄생』(발췌)/ 문둥이 : 서정주

문둥이 서정주(1915-2000, 85세)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전문- ▶ 서정주 시의 미학적 화자-『화사집』을 중심으로(발췌)_이현승/ 시인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미학적 태도로 인해 사물의 총체성이 탈락되는 것은 「문둥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의 절망을 세목보다는 그러한 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체념적인 내면을 미학적으로 승화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고 있다. 그 단초는 저 자유간접화법의 방법론에서 드러난다. 1연의 '해와 하늘빛이 서럽다'는 문둥이의 느낌은 화자가 문둥이에게 기투한 결과이다. 화자의 문둥이에 대한 투사와 동일시는 2연과 3연의 주어를 생략해도 불편하지 않다. 문둥..

오민석_『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발췌)/ 극형 : 김종삼

극형極刑 김종삼(1921-1984, 63)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먼 산 너머 솟아오르는 나의 영원을 바라보다가 구멍가게에 기어들어가 소주 한 병을 도둑질했다 마누라한테 덜미를 잡혔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토큰 몇 개와 반쯤 남은 술병도 몰수당했다 비는 왕창 쏟아지고 몇 줄기 광채光彩와 함께 벼락이 친다 强打 强打 -전문- ▶ 빈자貧者의 미학_김종삼 론,(발췌) _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김종삼을 소위 "순수시인"으로 범주화하는 행위는 현실도피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초래한 '족보 만들기의 희극'이다. 아무리 불러봐야 순수시인은 없다. 김종삼이 『문예』지에 등단을 거부당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하늘의 천사가 아니다. 김종삼은 극빈..

우진용 산문집『글자 기행록』中/ 버러지(詩) : 우진용

버러지 우진용 벌레도 아니고 그것도 버러지라니요 대체 뭘 잘못한 거요? 버러지만도 못하다니요 이 땅에 어쩌다 생겨나서 숨죽이며 겨우 살아가는데 얼마 되지도 않은 생마저 밟히거나 새들 먹잇감인데 벌레도 아닌 버러지라니요 아니 버러지만도 못하다니요 -전문, (p. 198) ▣ 머리말> 한 문장: 한글이 소리를 정확히 구현한 글자였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발음기관과 천지인天地人을 기호화한 24 글자족은 과학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그것으로 11,172개의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글자들이 소리라는 생명을 되찾은 것도 훈민정음이 발음기관의 소리 형성 원리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p. 9) 해설> 한 문장: 벌레가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에는 카프카의 『변신』이 대표..

작가연구 김점용 시인 인간론(발췌) / 중력 : 이철경

중력 이철경 시 토론 모임을 이끌어 오던 K시인이 2차 뇌종양 수술 후 악화된 증상의 회복을 위해 쫑파티 이후, 무기한 쉬기로 했네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절만이 절실한 기억으로 남는 건 아닌 듯, 방귀가 오직 살아있는 사람의 내장에서 만들어지는 가스인 것처럼 고통과 분노 허무를 공유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시간이었네 K시인이 쓰러지거나 주저앉더라도 살아 있으므로 위안이 되었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려 안간힘 쓰는 K시인을 보았네 수시로 넘어지고 의지와 상관없이 끌어당기는 중력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 시시포스 신화처럼 쉼 없이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설 날을 고대하네 -시집 『한장판 인생』, 2020. 실천문학 ▶ 작가연구 김점용 시인 인간론/ 시에 인생을 걸었던 어느 시인의 이야기..

오탁번_ 눈부신 돋을볕의 상상력(발췌)/ 오후 두 시 : 김다희

오후 두 시 김다희 시 삽니다 고장난 시 삽니다 쩔그렁 쩔그렁 시 장수 지나간다 끌고 가는 리어카에 짝 잃은 행과 지워진 시어들 와글와글 와글와글 짝짓기 하느라 북새통이다 쓰다만 시 삽니다 시 안 되는 시 삽니다 창문 밑에 서서 자꾸 보채는 오후 두 시의 가위소리 -전문- ▶ 눈부신 돋을볕의 상상력(발췌) _ 오탁번/ 시인 시 장수- 고물장수 가위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오후의 풍경이 고스란히 비쳐온다. 고장 난 시, 쓰다가 만 시, 시 안 되는 시를 팔라고 외치는 저 사내는 누구인가. 남장을 하고 나타난 뮤즈 아닐까. 고장 난 시도 내다가 팔고 쓰다가 만 불완전한 시도 속여 팔고 애당초 시도 안 되는 것을 끄적거리며 시인 행세를 하는 시인들을 질타하는 뮤즈의 목소리 아닐까. (p. 226-227) ----..

이숭원_ 서정과 서사, 그 느리고 빠른 결합(발췌)/ 라라에 관하여 : 오탁번

라라에 관하여 오탁번 원주고교 2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치악산을 한참 바라다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천장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극장 2층 나열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 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내부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고려가요어석연구』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 소리에 깨어난 아침, 차녀를 낳았다는 누님의 해산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본능의 바람이여, 아름다움이여. -전문- ▶ 서정과 서사, 그 느리고 빠른 결합(발췌)_이숭원/ 문학평론가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아침의 예언』 (조광, 1973)에 들어 있다. 1967년 중앙일..

김명철_『현대시의 감상과 창작』(발췌)/ 이것도 없으면 가난하다는 말 : 이현승

이것도 없으면 가난하다는 말 이현승 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