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7

이정현_'원서헌'에서 오탁번 시인을 만나다(부분)/ 백두산 천지 : 오탁번

백두산 천지 오탁번(1943-2023, 80세)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 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

못/ 김광선

못 김광선 언제부턴가 구두를 신으면 왼쪽 발이 아팠다. 가만히 살펴보니 새끼발가락 관절이 있는 곳에 '못'이 박혔다. 원래는 굳은살이라 하겠지만 치이고 또 치이고 동동거리면서 같은 곳으로만 힘을 지탱해야 했던 자리 나는 그 곳에 못을 치고 있었다. 헐렁한 작업신발 빡빡한 삶으로, 헐떡거리며 들숨날숨처럼 쾅쾅 못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옹이진 자리였다. 희망이라며 생업이라며 절벽 끝에서 버티었던 자리, 오늘 그 고통을 사포로 문지른다. 생살이 싸락눈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있다. -전문(p. 240) ▣ 몸과 몸의 교차점에서 흘러넘치기/ - 다섯편의 신작시 속에서의 몸(발췌)_이병금/ 시인 어느새 둘러보니 절벽 끝에 자신의 몸이 서 있다. 몸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육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길이 시작하면서부터 ..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구름 농사 : 유재영

구름 농사 유재영 일용할 이슬 몇 홉, 악기 대용 귀뚜라미 울음 몇 말, 언제고 떠날 추녀 끝 초승달, 책 대신 읽어도 좋을 저녁 어스름 아, 그 집에도 밥 먹는 사람이 있어 하늘 한 귀퉁이 빌려 구름 농사짓는다 -전문- ▣ 구름 농사와 인공 자연/ 유재영의 『구름 농사』, 구름 농사를 짓다 (발췌)_이병금/ 시인 시각과 청각, 촉각, 후각 등 신체의 모든 감각을 마치도 마술사처럼 통시적으로 감지해내는 것은 그의 시를 선명한 색깔과 형태로 도드라지게 한다. 그의 시가 자연을 압축, 재현하여 기호화에 성공한 이유는 기억의 지층 속 오래 살아남은 감각 촉수들의 강렬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개체들, 그들의 얽혀듦의 장인 고요, 적막, 여백, 빔을 창작 방법론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나비가 날아간 깊이 : 이진희

나비가 날아간 깊이 이진희 눈, 부셔 허공을 가차 없이 후려쳐 벤 듯 총성이 터지기 직전 하염없이 반짝이던 차고 새하얀 겨울 산비탈처럼 폭포 소리 무심한 해안 절벽의 지나친 아름다움처럼 유해의 흔적마저 없이 얕은 음각으로 남은 이름 -전문- ▣ 그녀는 그럼에도 시를 쓴다/ 1. 처음 빛에 매혹당하다(발췌)_이병금/ 시인 「나비가 날아간 깊이」에서 빛을 감지하는 또 하나의 눈은 그녀 자신의 내부로 한없이 빠져들어 그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 단단한 바닥에서 갑골문자처럼 오래된 언어를 만난다. 유해의 흔적마저 없는 이곳은 죽음조차 미끄러지는 빛의 피부일까. 그녀가 이끌린 매혹의 순간은 그녀만의 것이기에 육체 밑바닥에 침전물로 쌓인 언어의 사리들로 잡혀지지 않는 빛의 몸을 그려보고자 한다. 아니 빛의 육..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우대식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 우대식 오늘도 먼 데를 오래 바라보았으나 수평선에 눈을 맞추었으나 해가 제 몸을 다 우려 우는 다 저문 때에 대문을 닫네 사람의 말 중 가장 슬픈 단어는 사랑임을 되뇌며 묵은 나뭇잎 같은 마음의 문을 꼭꼭 여미네 눈물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일엔 죄밖에 없었을 것을 지는 메꽃에 마음을 두고 문을 닫아거네 사랑도 잘못 박힌 못을 뽑아버리듯 박힌 잔가시를 살이 천천히 뱉어내듯 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이 몽돌처럼 둥글어질 수도 있으련만 해는 지고 사람 많은 거리에 한 사람이 없네 온 몸이 눈물이라 물의 슬픔은 물의 울음은 드러나지 않네 - 『다층』 2008-가을호 / 전문 단평> 中: "눈물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일엔 죄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눈물에는 정화와 용서의 효능이 있..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

무령왕의 관정(棺釘)/ 문효치

武寧王의 棺釘 문효치 못을 뽑는다. 암흑과 침묵을 지키고 있던 堅固한 쇠못을 뽑는다. 날개를 달고 푸시시 깨어 날으는 言語의 어지러운 새때, 새떼의 자유로운 飛翔을 위해 새떼의 신선한 호흡을 위해 녹슨 쇠못을 뽑는다. 쇠못의 질긴 뿌리, 내 가슴에 답답하게 서린 뿌리도 함께 뽑는다. -전문- ▣ 백제시에 나타난 시의식과 백제 표상/ - 죽음 극복과 영원성 추구(발췌)_김기옥(본명,김밝은)/ 시인 '武寧王의 棺釘'은 무령왕의 관에 박혀 있는 못을 말한다. 문효치는 그 못이 자신의 몸에 박혀 있는 것으로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을 옭아맨 "녹슨 쇠못"을 자아성찰을 통한 정서적 깨달음에 도달해 뽑아냄으로써 자유로워지고 있다. "녹슨 쇠못"이 무령왕의 관에 박혀 무령왕이 죽은 자임을 알려준 것처럼 문효..

백제시-쿠다라 간이우편국*/ 문효치

백제시 쿠다라 간이우편국百濟簡易郵便局* 문효치 여기에서 편지를 부치면 천오백 년 전 고이왕 때쯤 주홍색 달빛이 피어나는 두루마기의 사나이에게 날아갈까 그 사나이의 고운 딸에게나 날아갈까 여기에서 편지를 부치면 먹칠로 막혀 있는 세월 너머 어둠의 완벽한 거부로 닫혀 있는 지하 거기까지 날아갈까 심장에서 데워진 진한 피 그러다가 와글거리는 숱한 독백 손끝으로 흘러내려 박아 쓴······ 여기에서 편지를 부치면 저 하늘 끝 아직도 저녁연기 피어나는 비 그친 마을 그 사립문 안에 날아갈까. -전문- (p. 51-52) * 쿠다라 간이우편국 : 일본 나라현의 한 시골에 쿠다라 간이우편국이 있다. ▣ 백제시에 나타난 시의식과 백제 표상/ - 죽음 극복과 영원성 추구(발췌)_김기옥(본명,김밝은)/ 시인 아좌태자는 백..

흘러갔다 : 강경호

흘러갔다 강경호 하늘에 강이 흐르고 있다 아버지는 그 강물이 우리 지붕 위로 흐를 때쯤 쌀밥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허기보다도 궁금했던 것은 어디에서 발원해 어디로 흘러가는지 유성처럼 죽어가는 것들의 근원이었다 꼬리를 흔들며 하얀 강물이 늦가을, 지붕 위로 흐를 때 강물 아래 기러기 떼 지나가고 뒤이어 좇아가는 길 잃은 기러기처럼 나는 찬이슬 내리는 밤하늘의 하얀 강물 아래로 혼자서 흘러갔다 때로는 밤새 눈짓하고 제 존재를 드러내며 가뭇없이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소리 들으며 아침이 올 때까지 강물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하늘을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혼자 흘러갔다 -전문- ▣ 강, 멈출 수 없는 생명의 흐름/ 강의 수사학(발췌)_강경호/ 문학평론가 ..

강경호_평론집『서양의 양식과 흔들리는 풍경』/ 純의 寢床에 부치는 글 : 이흥식

純의 寢床에 부치는 글 이흥식(1942-2007, 65세) 弱한 純의 體溫이 유리알 같이 맑아지는 순간. 먼 훗날을 기다리는 괴로운 時間들이 走馬燈처럼 지나가면 回復되는 花信의 記憶이 오리라. 아지랑이 아롱거린 山頂의 抒情이 흐르면 더 더욱 바쁜 季節이 오리라. 지금은 試驗中 시달린 心身이면서도 이런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不信의 객이 되었오. 純 純 아! 어서 疲勞의 地帶를 벗어나라. 어서 薰風의 입김을 내뿜으라. 나는 이렇게 꿈이 아닌 現室을 짓씹는다. -전문-- ▣ 고향의식과 실존의 서정/ 이흥식 론(발췌)_강경호/ 문학평론가 1. 이흥식(李興植)은 1942년 의사이며 장흥호생병원 원장인 이준용의 외아들로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에서 태어났다. 장흥초등학교 44회를 졸업하고, 광주로 진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