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금시아_시평집『안개는 사람을 닮았다』/ 춘천을 생각하며 : 이승훈

검지 정숙자 2022. 12. 26. 02:48

 

    춘천을 생각하며

 

    이승훈(1942-2018, 76세)

 

 

  속물이 다 된 내가 대견하다

  오오 고맙고 고맙다 오늘 저녁에도  고맙다

  내가 춘천에 산다면 이런 저녁이면 안개 속을 헤매리라

  춘천엔 안개가 있고 춘천은 춥고

  난 황량한 석사동에서 겨울저녁이면

  버스를 타고 싯벌건 노을을 향해 떠나리라

 

  춘천은 내 고향 그러나 한 번도 따뜻하지 않았다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문제다

  어린 시절 가정 문제고 젊은 시절 내면 문제고

  30대에 나를 휩쓸고 간 안개 같던 여자 문제지만

  개인 문제를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건 피해야 한다

 

  오늘도 가을이다 흐린 가을 언제나 춘천은 흐린 가을

  여자 문제로 아내와 싸운 것도 흐린 가을 둑길에서다

  춘천에서 나는 정신의 한량, 추억의 백수,

  어두운 시를 쓰던 우수의 건달, 그러나 이젠 속물이

  다 된 내가 대견하다 이젠 속물이라도 되었으니

  잘 된 일이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끝내자

    -전문(p. 68-69), 시집 『너라는 햇빛』(세계사, 2000)

 

   

   (前略) 시인은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몇 번을 떠나곤 했던가? 고향이지만 다정하고 따뜻했던 추억이 별로 없다는 시인은 2018년 추운 겨울날 고향 춘천의 품으로 영원히 안겼다.

  '춘천은 내 고향 그러나 한 번도 따뜻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시인은 얼마나 슬프고 불행한가. 어린 시절의 잦은 이주와 불안정했던 가정환경은 고향에 대한 부재를 불러왔고 부정적인 자의식은 그대로 우울과 외로움의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다 그립고 좋을 수만은 없다. 때론 불행한 만큼 고통스러운 장소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승훈 시인에게 춘천은 그런 곳이었나 보다. 고향에 대한 상실감은 병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게 되어 안개처럼 아련한 환상과 몽상의 세계로 숨어들게 했을 것이다.

 

  "시가 일상이고 시가 시론이고 시론이 일상이다"라고 한 시인의 말처럼 이 시는 아주 일상적이다. 그리고 쉬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에 자유연상기법과 자동기술법으로 시를 쓴다는 그의 시 세계는 쉽게 의미를 쫓으려 하면 버거워진다. 이제 '속물이 다 된' 나이의 춘춘은 그에게 '고맙고 고'마을 뿐이다. 왜냐면 안개 자욱했던 춘천에서 시인은 '정신의 한량, 추억의 백수, 어두운 시를 쓰던 우수의 건달'의 시기를 잘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겨울 저녁이면 버스를 타고 싯벌건 노을을 향해 떠나' 갔다. 왜 하필 춘천은 그에게 그저 '개인 문제'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흐린 가을 둑길'이었을까? (p.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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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시아 시평집 『안개는 사람을 닮았다』에서/ 2022. 12. 16. <산책> 펴냄 ※ 비매품

  * 금시아(본명: 김인숙)/ 전남 광주 출생, 2014년 『시와표현』 시 부문 & 2022년 『월간문학』 동화 부문 등단. 시집『툭,의 녹취록』『금시아의 춘천詩-미훈微醺에 들다』, 산문집『뜻밖의 만남, 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