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금시아_시평집『안개는 사람을 닮았다』/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서 : 박남철

검지 정숙자 2022. 12. 25. 02:29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서

 

    박남철(1953-2014, 61세)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안개에 아련히 젖은

  황금의 햇빛이 그 사이로 내리쪼이는

  춘천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녹음은 무성하고 캠프 페이지는 고요하다.

  벤자민나무는 푸른 분 속에 서서

  벌거벗은 채로 카페트 위에 깐 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다.

  오늘은 6월 7일---시간 강사의 일도 작파해버렸다.

  다만 이렇게 고요히 앉아 춘천 시가지 사이의

  캠프 페이지 사이의 녹음을

  멀리 동양화로 젖어 있는 산줄기들을

  바라다 볼 뿐이다.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낮게 깔린 시가지를

  내려다 볼 뿐이다. 시간도 인환도 없이

  6층 아래 내 배경에서는 7층 석탑이 서 있으리라.

    -전문(p. 50), 『창작과비평』(1996-봄호)

 

  (前略) 박남철 시인은 해체시의 선두 주자로 불린다. 그는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에서 춘천을 '진경춘천산수도'라 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어느 날, '자발적인 납치'라고 말하듯 춘천 어느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파트 안의 '벤자민나무 그늘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춘천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시간 강사 일도 작파'하고 미군 부대 캠프 페이지와 먼 산줄기들을 내려다보며 자유로운 상념에 빠진다. 이떄 춘천은 산과  물처럼 자유를 찾아온 이방인을 위해 고요히 배경이 된다. 배경은 그들의 은둔과 사랑의 밀회를 너그럽게 용납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박남철 시인은 기존 질서나 도덕률과 시 형식 등을 파괴한 패러디를 통해 세상에 항의한 시인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자질구레하지도 못한 상처들을 아주 많이 받게 되어' 문득 춘천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천 년에 걸친 인류사적인 '나는 나다'라는 명제를 자각하게 되었단다. 시인은 내가 막 시인으로 태어난 해인 2014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결핍에서 의지적인 초월로 영원한 자유를 찾아 떠난 노마디즘*적인 시인이다. 결국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춘천은 스스로 자처한 시인의 영원한 '정신적인 휴헐처'가 되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도 춘천이 배경이다. 연국배우인 경수(김상경)는 배역도 다 잃고 방황한다. 때마침 전화한 선배 성우를 찾아 무작정 춘천으로 온다. 청평사 가는 배 속에서 '회전문'에 관한 전설을 듣는다. 영화 <생활의 발견>은 경수의 '아름다운 도망'이다. 영화는 회전문을 통해 경수의 노마디즘적 사고, 곧 그의 자유로운 유목적 회귀를 따라가고 있다. (p. 52-53) / (後略)

 

  * 특정한 방식과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삶.

 

  ---------------------

  * 금시아 시평집 『안개는 사람을 닮았다』에서/ 2022. 12. 16. <산책> 펴냄 ※ 비매품

  * 금시아(본명: 김인숙)/ 전남 광주 출생, 2014년 『시와표현』 시 부문 & 2022년 『월간문학』 동화 부문 등단. 시집『툭,의 녹취록』『금시아의 춘천詩-미훈微醺에 들다』, 산문집『뜻밖의 만남, 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