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7

강경호_평론집『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 울음 : 최승호

울음 최승호 뼈다귀가 가죽을 내미는 늙은 것이 털이 빠지고 웅크린 채 홀쭉한 뱃가죽을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늙은 것이 쇠사슬에 목덜미가 묶인 채 짖어댄다 짖어댄다 짖는 일도 뜸하던 늙은 것이 머지않아 턱이 떨어지고 이빨마저 다 빠져버릴 병들고 늙은 것이 짖어댄다 짖어댄다 교회당 종소리가 뎅그렁거리고 유난히 크고 밝은 금성이 번쩍번쩍거리는 새벽에 돌연 늙은 개의 짖음은 음울하고 서러운 늑대의 울음으로 변해버린다 시커먼 늑대의 울음이 새벽하늘을 시커멓게 적셔버린다 -전문- ▣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과 최승호의 시(발췌)_강경호/ 문학평론가 스무 살 무렵에 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 65세)를 만났다. 이미 10여 년 전에 생을 마감한 화가였지만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의 존재를 알..

강경호_평론집『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 만종 : 추영희

만종 추영희 밀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린 저녁종 한 때의 유물 같은 평화로 낡은 종탑에서 타종되는 하루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들에 닿았다 돌아오는 저녁 거느린 종소리 아름답다 할 뻔했다 밤새 종 안으로 웅크려 들었다가 생육하고 번성한 것들 하루 내 생사 시퍼렇게 내미는 새벽종 희망의 입구라 할 뻔했다 대책 없이 굶주린 땅 죽어가는 아이의 눈도 목격한 햇살 주르르 흘린 혈변 같은 저 노을 또한 아름답다 할 뻔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만든 뜻 따라 생육하는 말로 붙여진 온갖 것들 번성할수록 종소리와 종루의 헐어진 속들 위장약을 틀어넣으며 절룩절룩 붉게 돌아오는 저녁 마지막 생기를 불어 축복하던 피조물들 그 뜻대로 부디 낡은 종탑 반대편 땅에서도 은은한 소리로 저물어 반성하는 포성과 울음 대신 삽을 꽂아놓고 조..

강나루『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 함평만(咸平灣) 1 : 강경호

咸平灣 1 강경호 술항개 重船이 떠나갈 때면 바닷가 절벽 위 가마는 연기 폭폭 퍼지르며 먼 바다로 떠나가곤 하였다. 이 땅의 백성들이 떠나가고 최가, 박가, 손가는 주인처럼 터를 채우고 馬家는 무덤 몇 송이만을 동백꽃으로 우거지고 파도소리로 머물렀다. 그리움처럼 금빛 햇살이 함평만을 내려비춰 쉽사리 잊혀질 파도 소리는 아니고 모래밭엔 꺠어진 기왓장과 해당화가 푸른 울음으로 흩어졌다 마포 가는 배 법성포 가는 배 썰물처럼 떠나가고 만선 조깃배 밀물처럼 밀려오면 깃 터는 황새의 목 빼는 울음 소리 그리움은 파도가 되고 영혼 깊숙이 찰랑찰랑 파도 소리만 들리고 - 시집 『언제나 그리운 메아리』, 샛별, 1987, p_111, (전문) ▣ 자연의 수사학/ 2. 민중적 언어(발췌)_강나루/ 문학평론가 · 시인 ·..

강나루『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 봄 들녘에서 : 강경호

봄 들녘에서 강경호 죽음으로 일생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서둘러 유품을 태우고 흔적을 지운다 해도 들녘엔 푸른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 거기 강물 끝 어딘가 무엇이 된 질긴 목숨이 손짓 발짓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한때 네가 살던 마을에도 나지막한 산언덕 오래된 봉분은 있다.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 무심해진다 해도 생전의 착한 것, 죄가 되는 것 어딘가를 떠도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너는 내게 불씨로 글썽이는데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무엇이 되어 다시 살아왔듯이 무엇이 되어 다시 살아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뜨거운 불씨로 이글거리는 것 차마 가슴 저며 숲과 강마다 살아 타오르는 것을 보라. 먼 옛날 무엇이었던 네가 저렇듯 수백 번 옷을 갈아입고 봄 들녘 또 누군가를 눈..

이구한『착란의 순간과 중첩된 시간의식』/ 공중에 떠 있는 것들 1-돌 : 정현종

공중에 떠 있는 것들 1 -돌 정현종 날아가던 돌이 문득 공중에 멈췄다 공중에 떠 있다 一說에는 그 돌이 정치적이라고 한다 그 소리의 化石의 年代는 애매하다 웃지 않는 운명만이 확실하다 다만 鐵裁 프로파갠더를 매일 독약처럼 조금씩 먹는다 - 시집『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전문) ▣ 의식의 지향성으로서 현상학적 고찰/ - 에드문트 후설의 관점에서(발췌)_이구한/ 문학평론가 "날아가던 돌이 문득 공중에 멈췄다" 돌이 공중에 멈췄다고? 시적 화자는 날아가던 돌을 공중에 멈추게 하는 강력한 힘, 강력한 권위를 경험하게 된다. 돌이 공중에 멈추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은 행동의 결과물을 의미한다. 돌을 던진 주체와 돌을 멈추게 하는 주체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돌이 정치적이라는 사실..

이구한_평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최정례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최정례(1955~2021, 66세)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뺸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

이구한_문학평론집『착란의 순간과 중첩된 시간의식』/ 나는 임종 때에 한 마리 파리가 : 에밀리 디킨슨

나는 임종 때에 한 마리 파리가 에밀리 디킨슨(미국, Emily Dickinson, 1830-1886, 56세) 나는 임종 때에 한 마리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네 방 안의 정적은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있는 공중의 정적과 같았다네 빙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도 마르고 숨소리도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왕께서 그 방에 임종 증언을 위해 현현하는 순간의 그 마지막 입성을 지켜보려고 나는 내 유품에 대해 유언을 했고 내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 가지라는 것에 서명을 했다네 그런 다음, 한 마리 파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네 푸른 정체불명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빛과 나 사이에 훼방을 놓았다네 그러더니 창이 가려졌고 그런 다음 나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네 - 『디킨슨 시선』 전문, 윤명옥..

신상조_산문집『시 읽는 청소부』/ 섬이 낳은 바다 : 이정란

섬이 낳은 바다 이정란 누가 생각을 잠그지 않아 바닷물이 갑자기 불어났다 섬에서 또 하나의 섬이 풀려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물체여서 기억하기는 쉽다 그를 잘 잊으려면 눈앞에 계속 있게 놔두어야 한다 섬과 섬은 서로의 바깥으로 서로의 안을 만들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비가 바깥의 가장 안쪽에서 내리고 있다 모든 상황은 빗줄기 속에 들어 있는 바람이 방향을 다 알기 전에 발생한다 -시집 『눈사람 라라』, 2023, 시작. (전문) ▣ 눈사람 라라로 읽는 비밀의 정원/ 시인 이정란과 김상열의 비밀의 정원(발췌)_신상조/ 문학평론가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달빛이며 수양버들과 대나무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수면으로 난분분하게 떨어진 벚꽃 잎의 장관, 차가운 눈밭에서 언 귀를 내민 듯한 풀잎·..

강인한_비평집『백록시화』/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 강인한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강인한 포켓이 많이 달린 옷을 처음 입었을 때 나는 행복했지. 포켓에 가득가득 채울 만큼의 딱지도 보물도 없으면서 그 때 나는 일곱 살이었네. 서랍이 많이 달린 책상을 내 것으로 물려받았을 때 나는 행복했지. 감춰야 할 비밀도 애인도 별로 없으면서 그 때 나는 스물 일곱 살이었네. 그러고 나서 십 년도 지나 방이 많은 집을 한 채 우리 집으로 처음 가졌을 때 나는 행복했지. 그 첫 번째의 집들이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해 태극기를 대문에 달고 싶을 만큼 철없이 행복했지. 그 때 나는 쓸쓸히 중년을 넘고 있었네. (1984. 6. 17) ▣ 3부/ 자작시 해설/ 우리 집의 독립기념일> 전문: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나는 상고머리에 스웨터를 입고 있다. 가로로 잿빛 굵은 줄이..

강인한_비평집『백록시화』/ 물 속의 사막 : 기형도

물 속의 사막 기형도(1960-1989, 29세) 밤 세 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맛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맛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빈들거리는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