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김정수
껍질을 벗기며 하얗게 우는 나무가 있지 인제와 원통의 강폭만큼 너른 숲은 속울음 같은 길들 감추고 있지 애를 업으면 길은 가파른 비탈을 펼쳐 젖은 등을 흘리지 발이 자꾸 미끄러지는 숲은 높은 곳에서 하늘을 보여 주지 반짝 흔들리지 구름과 구름 사이, 꽃을 따다 들킨 손은 언덕 너머 두고 온 집을 그리는 중독이지 연緣을 끊지 못하는 손금이지 전생의 상처 간직한 거미의 착각이지 마음 깊이 쑤셔댈 수 있는 가시 하나, 극소량의 독을 꽃나무에 들이지 평생 꽃을 떠나지 못하는 벌은 빨강으로부터 길을 훔치는 중이지 꽃 마중은 슬픈 착각, 렌즈에 갇힌 망각인 셈이지 한껏 팽창된 불편이 비탈에서 비를 뿌리지 젖은 삶이 흉터를 보여주는 것도 순간, 갓 태어난 고비가 지천이지 오래오래 가슴에 머물던 비명, 새처럼 날아올랐으면 좋겠지 도시를 떠나 재회한 첫사랑은 자작나무 껍질에 새긴 어긋난 운명을 말갛게 씻어내는 법을 알고 있지 나무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주말마다 찾아와 자작자작 울고 가지 하, 하늘소의 계, 계절이야
-전문-
▶ 먼 데서 오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열차/ 김정수 시집 『홀연, 선잠』_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이 시에는 김정수 시의 모체가 되는 것들이 나열되어 있다. "속울음 같은 길들", "가파른 비탈", "자꾸 미끄러지는 숲", 연緣을 끊지 못하는 손금", "전쟁의 상처", "젖은 삶", "고비가 지천"인 삶,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던 비명" 같은 것들은, 그가 떠나온 그 '먼 데'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풍경의 아프고 고된 '구체성'을 김정수는 마치 추상화를 그리듯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그가 왜 이렇게 비극으로 가득 찬 '출발지'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아프고 깊은 강밀도强密度 intensity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모체matrix가 그렇듯이 그것은 그 안에 너무나도 많은 서사들을 담고 있다. 독자들은 이것들을 막연히 짐작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시편들을 통하여 그 '먼 데'를, '고통이라는 이름의 기차'가 휙휙 지나가며 보여주는 편린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편린들은 아프고 슬퍼서, 독자들은 그 고통스러운 것들의 정거장에 오래 머물게 된다. (p. 시 289/ 론 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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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석 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에서/ 2022. 11. 28. <문학의전당> 펴냄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창간호 신인상 시 부문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연구서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경계에서의 글쓰기』『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시와경계 문학상, 시작문학상 수상. 현) 단국대 영미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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