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김지율 연구서『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신화의 계절 : 김춘수

검지 정숙자 2023. 2. 23. 15:37

 

    신화의 계절

 

    김춘수(1922-2004, 82세)

 

 

  간밤에 단비  촉촉이 내리더니, 예저기서 풀덤불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가지마다 나뭇잎은 물방울 흩뿌리며, 시새워 솟아나고, 

  점점點點이 진달래 진달래가 붉게 피고,

 

  흙 속에서 바윗틈에서, 또는 가시 덩굴을 헤치고, 혹은 담장이 사이에서도 어제는 보지 못한 어리디어린 짐승들이 연방 기어나고 뛰어나오고······

 

  태고연히 기지개를 하며 신이 다시 몸부림을 치는데,

 

  어느 마을에는 배꽃이 훈훈히 풍기고, 휘녕청 휘어진 버들가지 위에는, 몇 포기 엉기어 꽃 같은 구름이 서西으로 흐르고 있었다

    -전문-

 

  신화적인 자연 공간과 원형의 헤테로토피아(발췌) _김지율/ 시인 · 문학평론가 

  이 시의 장소는 단비가 내리고 진달래가 피어 있으며 어린 짐승들이 담장 사이로 뛰어나올 것 같은 그런 이상적인 곳이다. 시적 주체는 '태고연히 기지개를 하며 신이 다시 몸부림을 하는' 평화로운 이곳에서 신화의 계절을 맞이한다. 모든 생명과 자연이 화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마을"은 폭압적 역사나 문명화된 현실과 대비되는 곳이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 신화의 세계는 모든 생명들이 동경하는 원초적인 사랑과 낭만이 있는 무욕無慾의 공간이다.

  이와 같이 김춘수의 원형적 헤테로토피아는 '장소 밖의 장소'로서 '언어' 즉 '시어'나 '관념'으로 작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즉 실재하는 장소와 언어로만 존재하는 장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푸코가 제시한 '언어의 비   장소'는 언어가 지시하는 장소로서 현실의 장소와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장소 아닌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말과 사물』에서 '헤테로토피아'는 문학의 공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즉 이것은 '언어가 공간과 교차'하면서 파생시킨 '장소적 상상력'을 통해 시적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38)

  1950년대 김춘수 시에서는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실존적 성찰로서 이 신화와 원형적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그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p. 시 107-108/ 론 108-109)  

 

   38) 엄경희, 『헤테로토피아의 장소성에 대한 시학적詩學的 탐구』, 『국어국문학』 186호, 국어국문학회, 399~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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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율 연구서『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에서/ 2022. 11. 24. <국학자료원 새미> 펴냄

 * 김지율/ 2009『시사사』로 등단, 시집『내 이름은 구운몽』『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 대담집『침묵』, 詩네마 산문집『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들』, 연구서『한국 현대시의 근대성과 미적 부정성』『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