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이유
변종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돌아온다고 했다
긴 골목은 축축하고 가로등은 꺼져 있다
드레스 한 장만 사고 돌아온다는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이프로 사람 죽여봤어요?
나이프는 살인도구가 아니야
어떤 색을 골라드릴까요?
파랑 물감을 덧바르면 인생이 바뀔 거예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나이프를 씻어둬야지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서 새처럼 울어봐 지저귀라구
날아가는 새의 발톱에 밑줄을 그어줘
빨강 루즈로 진하게 밑줄을 그은 다음 새처럼 울어줘
물감을 짜기 전에 뭘 그릴지를 먼저 결정하라고
도대체 그림은 언제 그리는 거야
창가에 앉아보라니까 지저귀라니까
새 울음소리를 그릴 거야
새는 무슨 색으로 울지
네가 떠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물감이 마르지 않아
십 년에 십 년이 지나도록 새가 울지 않아
창문을 닫아, 바람이 들어오잖아
거짓말하지 마 새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난 그림을 그릴 거야
-전문, 『문학과의식』(2020-겨울호)
▶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발췌)_김남호/ 문학평론가 · 시인
'나'는 그녀의 생전에 잘해주지 못했다. 좋은 옷도 사주지 못했고, 바람 들어오는 창가에서 즐겁게 지저귀게 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삶에 밑줄을 그어가며 존재를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죽었고, 그녀가 "한 장만" 사고자 했던 "드레스"는 수의壽衣가 되고 말았다. 나는 회한으로 가득하다. 내가 해주지 못한 것들을 그림으로라도 그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리는 일은 나의 무능과 무책임을 새삼 확인하는 일일 테니까. 그렇다면 제목 「마르지 않는 이유」에서 마르지 않는 것은 '물감'이 아니라 결국 '나'의 '눈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빨강 루즈로 진하게 밑줄을 그은 다음 새처럼 울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피눈물을 바치는 '나'가 아니겠는가.
시를 이렇게 산문적인 언어로 전개해서 한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은 어쩌면 시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시를 감상하는 자가 아니라 시를 설명하고 비평해야 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업業이다. 이 시는 꼭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전혀 다르게 재구성해서 전혀 다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틀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시를 썼는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정서와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물론 취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이런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시는 아주 매력적인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p. 시 59-60/ 론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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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호 평론집 『깊고 푸른 고백』에서/ 2022. 10. 15. <북인> 펴냄
* 김남호金南鎬/ 경남 하동 출생, 2002년 계간 『현대시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5년 계간 『시작』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링 위의 돼지』『고래의 편두통』『두근거리는 북쪽』, 디카시집『고단한 잠』, 평론집『불통으로 소통하기』. 형평지역문학상, 디카시작품상 수상. 현) 박경리문학관 & 이병주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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