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이영광
이렇게 먼 곳까지 함께 왔다
안개는 짙어
일출은 물 밑으로 오고,
장닭처럼 오래 무적霧笛이 울었다
산정의 등대에는 모자 쓴 마네킹 등대지기가
사람 눈보다 더 까만 눈으로
먼 바다를 투시하고 있었다
뒤편 기슭, 야외 등대 박물관에는
갓 태어난 새끼 등대들이
여기저기 웅크린 채 자라고 있었다
알집 벽에 빼곡히 매달린
크고 작은 알처럼
그리고, 섬의 절반은 목장이었다
우리는 사라지면서 걸어갔다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말들이 나타나
조용히 스쳐 지나가거나
다가와 순한 눈을 껌벅거렸다
간밤 당신 몸에 혹, 아기가 들지 않았냐는 듯이
-전문-
▶ '증상'의 시학/ 이영광론_아날로지와 알레고리를 횡단하는 시(발췌)_김영범/ 문학평론가
이영광에게 사랑에 대한 시는그렇게 많지 않다. 위의 시는 몇 편 되지 않는 그의 사랑시 중 하나이다. 배경이 제주도의 부속 섬 '우도'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신혼여행의 한때를 그려 내고 있다. 신혼부부가 "마네킹 등대지기"와 "갓 태어난 새끼 등대들" 그리고 "말들"이 이루는 풍경 속을 걷고 있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제2의 자연인 인공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 광경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음에 유의하자. 한 쌍의 부부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바로 그 불확실성이 그들을 단단히 끌어안게 하는 계기가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미지수이다. 목장을 둘러싼 울타리를 지칭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결속된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인 '우리'는 이 시에서 이렇게 진술된다. "우리는 사라지면서 걸어갔다". 울타리는 안개 속에서 매 순간 새로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순간순간 상대방에게 충실할 때 '우리'라는 관계는 유지될 수 있지만, 서로의 손을 놓쳤을 때 그것은 와해된다. 따라서 안개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속성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이다. (···略····)
한편으로 이 시에서 자연과 인공물 그리고 인간 사이에 어떤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가 이들 삼자를 둘러싸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를테면 이영광은 이 시를 통해 삼자 사이에 아무런 충돌과 대립이 없으며 사람들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한때를 그려 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이 시는 아름다운 인간 공동체에 대한 아날로지로 읽는 게 가능해진다. (p. 시 97-98/ 론 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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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범 평론집 『증상의 시학』에서/ 2023. 1. 20. <파란> 펴냄
* 김영범/ 1975년 경남 밀양 출생, 2013년 『실천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한국 근대시론의 계보와 규준』『신라의 재발견』(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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