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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_비평집『21세기 한국시의 표정』에서/ 책과 공 : 박형준

검지 정숙자 2020. 12. 21. 02:18

 

 

    책과 공

 

    박형준

 

 

  밤에 강변에 나오면 만나는 사람

  세 시를 새벽이라고 해야 되나

  한밤중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산책을 나오기에는 어중간한 시간

  오늘도 여전히

  사내는 가로등 밑에 서서 책을 읽는다

 

  나는 가방에 글러브와 야구공을 챙겨 넣고

  강변으로 나와 

  가로등 밑 책 읽는 사내를 지나

  고가도로 아래

  교각에 가서 공을 던진다

  고가도로 위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속도가 나지 않는 공을 

  교각의 벽을 향해 던진다

 

  밤 세 시에 가로등 불빛 아래서

  사내가 읽는 책에는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완벽한 문장이 있을 것 같다

  승수보다 패수가 많은 사회인야구 패전처리 투수도 

  밤 세 시에 교각의 벽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떤 타자도 칠 수 없는 이 세상

  단 하나의 공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전문-

 

 

  물화된 세계에서의 절대성을 향한 의식의 개시開示 (발췌)_ 김윤정/ 문학평론가 

  모두 잠들어 인적이 드문 시간, 모든 업무가 끝나고 생산 활동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시각인 '새벽 세 시'에 화자가 구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공'이다. 이런 수사는 심상치 않다. '단 하나의', '유일한', '완벽한' 등은 절대성의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 시에서 화자는 '어떤 타자도 칠 수 없는 이 세상 단 하나의 공'이라 부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단 하나의 공'이 위 시의 화자를 현재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의의를 지니는 것임을 암시한다. 즉 위 시에서 '단 하나의 공'은 화자를 구원해줄 정도의 위상을 띠고 등장한다.

  '단 하나의 공'의 절대성은 같은 시각 '가로등 밑에 서서' '책 읽는 사내'의 책에 수록된 '완벽한 문장'에 비견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유일하고도 무이한 문장에 해당될 것이다. 말하자면 '단 하나의 공'과 '완벽한 문장'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라는 점, 유일무이하다는 점, 그것을 구하는 자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점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절대적 가치를 위 시의 등장인물들은 '한밤중'이라고 할지 '새벽'이라고 할지 애매한 시각에 '사람들'이 없는 장소에서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고속도로'를 배경으로 하여 구하고 있다. 이 같은 조건들, 그러니까 시간상 구분짓기에 불분명하고 장소 자체가 다수의 사람들과 무관하며 빠른 속도성으로부터도 벗어난다고 하는 조건들은 모두 현대의 문명적 조건과 대비되는 것들이다. 현대의 문명적 조건과 대비되는 상황 아래 구하고 있는 '유일한 문장'과 '단 하나의 공'이야말로 그 자체로 사적인 절대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 동시에 현대 사회의 이면에 놓인 가치를 상징한다. (p. 83-85)

  ■ 『시사사』 2019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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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비평집 『21세기 한국시의 표정』에서/ 2020. 8. 27. <박문사> 펴냄

  * 김윤정/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국문과 교수

    【주요저서】 김기림과 그의 세계/ 한국모더니즘문학의 지형도/ 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학비평과 시대정신/ 불확정성의 시학/ 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현국 현대시 사상 연구/ 위상시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