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곰탕 한 그릇/ 고선주

검지 정숙자 2024. 8. 12. 20:32

 

    곰탕 한 그릇

 

    고선주

 

 

  문예창작과 지망생인 딸내미가 올빼미가 됐다

  뜬 눈 하얗게 지샜지만 날아가지 못했다

  밤새 글 날갯짓하느라 기상은 없고 눈만 뜨다

  점심을 맞는다

  방문 열어도 모른 채

  죽음보다 깊은 잠

  밤새 잘 익은 글을 원했을 것이지만

  한참 나갔던 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멀리 줄거리를 뺀 줄알았는데

  여전히 초입니다

  늘 잘 익은 글을 소망했겠지만

  풋내 가득한 글만 만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사십년 넘게 글을 써 왔으나

  여전히 곰삭은 글을 맞이하지 못했다

 

  살면서 서로 피차 뜨거운 맛은

  피해보자 약속하며

  사춘기와 갱년기 간 일시 휴전을 선언한 뒤

  곰탕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포장 하나 해서 털레털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앉은 딸내미 무릎 위에

  신작 시집을 깔고 포장해온 곰탕 한 그릇 올려놓았다.

  집에 도착해 내릴 무렵

  단 한번도 익혀보지 못한 시편들이

  따끈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우연히 잘 익은 신작시들 앞에서

  딸내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전문(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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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아돌하』 2023-여름(67)호 <신작시>에서

  * 고선주/ 전남 함평 출생, 1996⟪전북일보⟫ 신춘문예 『열린시학』등 시와 평론 발표, 시집『꽃과 악수하는 법』『밥알의 힘』『오후가 가지런한 이유』『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