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동억_인간을 향한 기다림(발췌)/ 손바닥의 샘 속에 : 박형준

검지 정숙자 2024. 8. 12. 00:51

 

    손바닥의 샘 속에

 

    박형준    

 

 

  손바닥은 그릇이라 여기며

  샘가를 거닐다 보니

  손바닥에 고이는 하늘,

  농사짓지 않아 논바닥에 가득 핀 패랭이꽃

 

  웃지 않던 아버지 웃음 같

  손바닥 속 꽃

 

  샘물이 흘러넘쳐

  손바닥은 그릇이 되고

  "저녁 밥 먹어라"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고이고

 

  몰래 손바닥에 피었다 간 꽃과

  그늘과 방향 잡지 못하고 헤매던 청춘의 길과

  저쪽 버스정거장에서 내리는,

  겨울에 이불 함께 덮어쓰고 불 끄고 텔레비번 보던,

  옆집 아이, 서울 가서 하이힐 또각거리며

  신작로를 걸어가고

 

  신작로에 날리는 먼지,

  여자에의 웃음소리 미숫가루처럼 풀풀 날리고,

 

  손바닥의 샘 속

  손금처럼 샘 솟는 패랭이의 뿌리

 

  초여름 들판에

  샘물이 있고

  지금은 없는

  샘 속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 있고,

 

  저기 어디쯤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애가 패랭이꽃 분홍빛으로 아려오고

  나는 손금에 비친 하늘을 내려다보며

  집을 행해 걸어간다

     -전문-

 

  인간을 향한 기다림/ 박형준 시인의 시 세계(발췌)_박동억/ 문학평론가

  인간의 터전은 가족이다. 이것은 박형준 시인의 자연 서정시를 이루는 가장 깊은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어떻게 손바닥에 하늘을 쥐는가. 넘치는 샘물을 얻는가. 부모를 떠올릴 때 그러하다고 시인은 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람의 손은 가득하다. '나'는 "청춘의 길"을 헤매고 상경하여 "신작로"를 거닐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샘 속의 불러보고 싶은 이름"과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손금'과 '하늘'과 '집'의 방향은 나란히 놓인다. 그것이 모두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근원적인 거처이기 때문이다.

      (···)

  박형준 시인의 시에서 세상을 감각하는 위치는 피부다. 따라서 샘물의 부드러움은, 더욱이 그 샘물을 받아든 매개가 '손'이라는 사실은 '스미는' 물의 자세로 세상과 관계하고자 하는 윤리적 지향을 암시한다. 그의 시에서 반복하는 '부드러움'의 표상은 세상의 냉담을 냉담으로 놓아두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p. 시 79-80/ 론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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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아돌하』 2023-여름(67)호 <신작소시집/ 신작시/ 작품론>에서

  *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나는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불탄 집』『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박동억/서울 출생,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