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한 편>
할머니도 부끄러워요?
금시아(글) / 최영란(그림)
"향아야, 빨리 학원 가야지."
엄마가 주방에서 큰 소리로 재촉한다.
"네. 갑니다. 할머니도 빨리요"
향아는 할머니 손에 노래 가방을 들려 주고 제 피아노 가방도 얼른 챙겨서 나간다.
발소리 뒤로 현관문이 쾅, 닫힌다.
할머니는 혼자서 농사지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그런데 많이 아파서 지난봄에 향아 집으로 왔다.
할머니는 예전과 다르게 모든 게 느려졌다.
그렇게 말도 행동도 어눌한 할머니가 민요를 배운단다.
"엄마, 민요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떻게 배워요?"
"아냐, 이젠 나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해 보고 싶구나."
엄마가 말렸지만 할머니는 기어이 동네 복지관 민요반에 등록했다.
그날 밤 향아는 엄마가 아빠랑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몸도 안 좋으면서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우시나 몰라."
"그냥 둬.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하시게 좋아하시잖아."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중얼중얼 가사를 외웠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엄마, 난 할머니가 웅얼웅얼하는 거 무서워."
"얘는? 노래 가사를 외우는 건데 무섭긴 뭐가 무서워?"
"할머니는 깜깜한 데서도 혼자 막 중얼거린단 말이야."
향아가 슬그머니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 크게 하세요, 크게."
"나도 그러고 싶은데 가사가 얼른얼른 안 외워지는구나.
자꾸 틀리니까 부끄럽잖아."
할머니가 느릿느릿 말했다.
"네? 할머니도 부끄러우세요?"
향아는 갑자기 할머니가 귀여워 킥킥 웃었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엄마가 할머니께 물었다.
"엄마, 재미있어요?"
할머니가 동사무소 복지관으로 민요를 배우러 다닌 지 벌써 반년이 지나간다.
할머니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어려워도 하는 거지 뭐. 그냥 재미있어서 노는 거야."
"에이, 할머니는. 어려운데 뭐가 재미있어요?"
"그러게 엄마. 애쓰지 말고 그냥 노인정에나 가시라니까요."
"아니야, 힘들어도 가사가 조금씩 외워질 땐 기분이 좋아."
"할머니, 머리 안 아파요? 난 악보만 보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엄마가 할머니한테 배운 노래를 한 소절 해 보라 한다.
향아도 손뼉을 치며 할머니를 부추긴다.
"할머니, 나도 할머니 노래 듣고 싶어요."
"야들이 왜 이래? 둘 다 누굴 놀리니?"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더니 입을 꾹 다물고서는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린다.
"에이, 엄마는. 난 엄마가 조금이라도 쉬운 걸 했으면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엄마, 나도 좀 쉬운 거 하면 안 돼요? 나도 다른 거 하고 싶어."
요즘 피아노가 어려워 힘들어진 향아가 이때다 싶어 엄마를 조른다.
순간 엄마 눈이 가자미처럼 가늘어지고 목소리가 금세 높아진다.
"너 이 녀석, 피아노 배우겠다고 떼쓴 거 벌써 잊었어?"
그때 할머니가 향아를 가만히 껴안고 다독인다.
"향아야, 나는 네가 얼마나 부러운지 아니?"
"왜요? 할머니? 내가 왜 부러워요?"
"지금 너는 할 게 많고 뭐든지 해 볼 수 있는 때잖아."
할머니는 정말 좋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향아 머리를 쓰다듬는다.
"근데 할머니, 나는 진짜 피아노에 소질이 없나 봐요."
엄마가 어리광을 부리는 향아의 말을 단번에 자른다.
"너 정말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엄마는 나빠. 할머니한테는 쉬운 거 하라 하고,
나는 왜 싫다는데도 안 된다고 그래?"
엄마는 왜 나에게만 더 화를 내는 것일까? 향아가 입을 삐죽거린다.
"너, 혼 좀 나야 정신 차릴래?"
"왜들 그러니? 이젠 그만해라, 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할머니가 말리는데도 엄마의 큰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싫다는 거 억지로 시켜 봐야 돈만 아깝지 뭐.
당장 피아노도 팔아 버릴 거야."
엄마는 얼른 화가 사그라지지 않나 보다.
"에고, 내가 문제다, 내가 문제야."
"왜 다들 그러는지 몰라.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향아는 그때서야 아차! 꼬리를 내리고는 얼른 제 방으로 달아났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향아가 수정이에게 물었다.
"수정아, 너는 피아노가 재밌니?"
"응."
"응? 넌 전혀 안 어려워?"
"어렵지. 어려워도 그냥 쳐. 연습하다 보면 좀 나아지잖아.
그땐 기분도 좋아지고."
"어? 너도 우리 할머니랑 똑같은 말을 하네."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럼 기분이 좋아진다고 우리 할머니도그랬어.
너는 나중에 피아니스트 될 거니?
"글쎄. 그건 모르지. 너는?"
"어휴. 나도 몰라. 난 꾸준히 하는 게 하나도 없어서 큰일이야.
도대체 나는 뭐가 되려고 이럴까?"
향아가 어른처럼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때 복지관 앞에서 신호등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얘들아, 피아노 학원 다녀오니?
"네, 할머니."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가자. 우리 천사들, 뭐 먹을래?"
"와! 피자요, 피자. 우리 할머니 최고."
향아와 수정이가 신이 나서 달린다.
향아와 수정이와 할머니는 피자를 먹으면서 사이좋은 친구처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 가사 다 외웠어요?"
"에구, 아냐. 얼마나 헷갈리는지 몰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원. 외우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구나.
그래도 해 보는 거지 뭐."
"와! 우리 할머니 대단! 대단! 멋져요 할머니."
향아와 수정이는 진심으로 할머니를 응원했다.
"우리 향아도 피아노가 좀 좋아지고있나?"
"할머니, 향아도 피아노 연습 열심히 한대요."
향아가 입을 오물거리는 사이에 수정이가 얼른 대신 대답했다.
"할머니,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향아와 수정이가 활짝 웃으며 배꼽인사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의 가로등이 벌써 환했다.
"할머니! 할머니!"
향아가 병원 침대에 누운 할머니를 흔들었다.
"엄마, 할머니 돌아가시는 거 아니지?"
엄마가 향아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지금 파킨슨이란 병을 앓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향아야, 이제 할머니는 점점 더 몸을 못 움직일 거야.
약을 드시지만 우리가 많이 도와드려야 해, 알았지?"
엄마는 며칠 동안 병원과 집을 바쁘게 오갔다.
할머니는 병원에 누워서도 가사를 중얼거렸다.
웅얼웅얼할 때마다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았지만 할머니는 신경도 안 썼다.
"할머니, BTS 알아요?"
요즘 향아는 BTS에 푹 빠져 있다.
"그게 뭐냐?"
"할머니,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인데요
정말 잘생겼고요. 세계에서 제일 훌륭해요.
그런데요 할머니, BTS 노래 중에도 민요가 들어 있어요."
향아는 할머니가 알아듣건 말건 신이 나서 떠든다.
할머니는 그런 향아를 웃으며 쳐다보면서도 입으로는 뭔가를 웅얼웅얼했다.
할머니 때문에 식두들은 제각각 바빠졌다.
향아는 이제 피아노가 싫다는 투정을 부릴 데가 없다.
엄마가 병원에 가면 집은 너무 조용했고 향아는 심심할 때마다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서 놀았다.
피아노 몇 곡 치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엄마는 누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피아노를 두들기고 있는 향아를 보다가 살금살금 주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향아는 같은 방에서 서로 민요와 BTS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젠 향아의 귀에도 할머니의 가사가 제법 들렸다.
할머니를 흉내 내며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하다가
'무슨 가사가 이래?' 하며 킥킥 웃었다.
향아가 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민요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럼. 내가 이렇게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모른단다."
"할머니, 할머니는 민요 가수 할 거예요? 나도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하나?"
할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하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가수는 뭔 가수,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너도 그냥 좋은 만큼만 해."
"좋은 만큼?"
향아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할머니는 계속 웃었다.
할머니 민요 발표회 날이 왔다.
향아와 수정이는 꽃다발을 들고 복지관으로 갔다.
한복을 차려입고 곱게 화장한 할머니는 정말 예뻤다.
향아와 수정이도 크게 두 팔 하트를 그리며 할머니를 응원했다.
"할머니! 파이팅."
"엄마, 약 잘 챙겨 드셨어요?"
엄마가 할머니보다 더 긴장 한 거 같았다.
할머니는 목소리가 작았지만 여럿이 부르는 노래도, 혼자 하는 부분도 잘 해냈다.
저녁을 먹으며 아빠가 숟가락을 입에 대고 어나운서처럼 물었다.
"자, 어머님을 위한 파티입니다. 어머님, 공연을 마친 소감, 한마디 하시죠?"
"이런, 이런, 박 서방까지 이러긴가?"
엄마는 부끄러워하며 얼른 고개를 돌리는 할머니 말에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의 건강은 점점 안 좋아졌다.
복지관에도 못 가고 집에서도 휠체어에 앉아 움직이신다.
할머니는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입을 달싹달싹거리고는 했다.
"할머니, 지금 무슨 가사를 외우세요?"
그럴 때면 향아는 할머니 코앞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장난을 치고는 한다.
현관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향아야, 학원 가자."
"그래."
가방을 들고 후다닥 뛰쳐나가며 향아가 외친다.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전문(p. 85-98)
* 블로그 참고: 글과 잘 어울리는 그림은 책에서 감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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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집 『똥 싼 나무 』에서/ 2024. 9. 9. <푸른사상사> 펴냄
* 금시아/ 전남 광주 출생, 2014년 『시와표현』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입술을 줍다』『툭,의 녹취록』, 사진시집『금시아의 춘천 시詩_미훈微醺에 들다』, 산문집『뜻밖의 만남, Ana』, 시평집『안개 사람을 닮았다』
* 최영란/ 대학에서 서양화 전공, 현재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림. 그린 책『느티나무 괴물들』『동시와 동화로 배우는 속담 쏙쏙』『떡할머니 묵할머니』『땅꼬마 날개 펴다』『고래가 보내 준 소망편지』『지나의 엄마놀이』『친구, 내 친구 만들기』『슈퍼 울트라 썜쌤보이』『움직이는 바위 그림』『오소리길과 오소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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