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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荒野)의 휴머니즘(Humanism)/ 황진섭

황야荒野의 휴머니즘Humanism 황진섭 고구려인의 후예들이 한반도 북쪽 광대한 영역에 세운 나라가 발해다. 발해 옛 터전에 아무르강이 흐르고 있다. 필자가 연해주에서 바라본 아무르 강변 양안은 광대한 황무지다.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1시간 반, 시베리아 횡단철도 아케안호 편으로, 밤을 새워 달려가는 철도 연변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스리스크까지 고속도로로 달려가는 112㎞, 그 벌판도 황야다. 헤이그 밀사단 수석대표였던 이상설李相卨 의사의 유허비에서 바라보는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땅은 기름져 보이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 늪이 되어있거나 정리되지 않은 하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열차에서나 버스에서 황야의 수풀 속에 작은 마을들이 보였고, 마을 언저리에 듬..

에세이 한 편 2023.12.05

장적_2045, 열린사회와 그 적들 : 한반도···(발췌)/ 실향기 : 박훈산

실향기失鄕記11) 박훈산(1919-1985, 66세)12) 눈을 뜨면 또 내일이란 것이란다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새겨진 징그러운 오늘이 내일로 이어간다 앞으로 나아가는 바른 자세는 비틀거리는 걸음 틈에 가로막혀 연륜과 더불어 빨갛게 쏟아온 피 인생은 병들었다 찢어진 가슴 한 귀퉁이에 따뜻한 정을 얹은 보드라운 손길이! 싱싱한 바람을 따라 훌훌 떠나고 싶구나 어디든 그만 가고 싶다 내일이란 오늘로 되도는 어긋난 바퀴에서 정말 눈을 가리고 싶네 -전문- ▶ 2045, 열린사회와 그 적들 : 한반도 문화창발에 부쳐-2(발췌) _장적 아침에 눈을 뜨니 '내일이라는 것'이 시작되는데, 그 묘사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릴적, 소풍날 아침에 배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동편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비가 올지도..

창/ 성은주

창 성은주 창문을 읽다가 깨진 조각으로 글씨를 썼다 흙에서 피가 났다 붉은 웃음처럼 번지는 방향이 더없이 좋았다 떠나고 싶을 때 돌멩이라 적고 투명한 페이지를 뜯어낸다 흰 척추는 구부러지지 않고 그냥 깨질 뿐이다 뾰족한 단어가 걸어 나온다 내 옆구리에 마침표 같은 구멍이 생겼다 -전문(p. 301) * 블로그 註/ '여기 있음' Part 는 책에서 일독 要) ------------------ * 『포지션』 2022-여름(38)호 에서 * 성은주/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창』이 있음

곰의 내장 속에서만/ 나희덕

곰의 내장 속에서만      나희덕    괴혈병에 걸리면 더 이상 고기를 씹을 수 없게 되고  북극에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북극에서는 죽어도 썩을 수가 없다지  유빙들 사이로 떠다니며 영원히 잠들 수 없다지   죽으러 갈 수 있는 곳은  북극곰의 내장,  따뜻한 내장 속에서만 천천히 사라질 수 있을 뿐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업고 가서 얼음 벌판에 내려놓고  어머니를 곰에게 먹이로 바치고  어머니는 어서 가라, 아들에게 손을 흔들고  아들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언젠가 자신이 묻힐 곰의 캄캄한 내장 속을 생각하고   이글루 속에서  이글루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이도 자라고  물개나 바다표범을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곰을 잡아 곰고기도 먹지만  이누이트족이 곰의 내장을 ..

개화/ 최백규

개화 최백규 그날 이후 아버지는 터진 폭죽 같았다 여름 축제의 끝 무렵처럼 식어가고 있었다 먼 산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일몰이 스며들었다 철 지난 꽃들이 수런대는 사이 사람이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괜찮은 걸까 올해 들어 뒤꼍의 철쭉마저 일찍 졌다는데 흐드러지지도 못하고 바닥만 뒹굴겠구나 어머니는 상한 자두를 잘라내고 있었다 나는 고장난 손목시계를 붙들고 머뭇거렸다 어머니, 화분이 또 죽었어요 아무래도 저만 계속 실패하는 것 같아요 아니란다 얘야, 너는 최선을 다했단다 힘들면 이번 생에서 그만둬도 괜찮아 그런데 여름 과일은 왜 이리도 쉽게 무를까 언제쯤 다른 집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지 않는 집에 누울 수 있을까 언덕 위 성당 종소리를 따라 나도 어딘가로 희미해지는 듯했다 어느새 아버지의 숨소리도 잦아..

막다른 골목/ 정우신

막다른 골목 정우신 당신과 걸었던 동네를 다시 걸어봅니다 미용실이 부동산으로 바뀌고 오토바이 핸들의 방향 담장 밑의 고양이들 고개가 축 늘어진 나뭇가지 여전한데 그때도 지금도 당신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느린 바람을 잘 맞이하는 사람 버려진 우산을 살펴보거나 머리를 다시 묶고 나비를 바라보네요 당신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나무 그늘을 들여다보듯 깊이를 재어보듯 휘날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읽은 간판이 없을 때 연인들은 눈을 감고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맹세하네요 나는 나뭇잎처럼 색을 바꿀 수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지만 당신과 나란히 날아보는 연습을 합니다 사거리 꽃집이 나타날 때까지 -전문(p. 182-183) ------------------ * 『포지션』 2022-여름(38)호 에서 * 정우신/ 2016..

감각/ 이제재

감각 이제재 그때 나는 이 층 베란다에 기대어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담배를 피운 적도 있고 새를 흉내 내는 휘파람을 작에 불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는 위를 쳐다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방학의 나는 기숙사 방에 혼자 있었고 옥상에서 지하 식당까지 그 건물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보고 걸어가는구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구나 여름이면 건물을 에워싼 나무의 잎이 무성했고 어떤 나무는 이 층과 삼 층 사이로 가지를 늘어뜨리곤 했습니다 손을 뻗어 잎사귀를 쥐었다 놓아주는 동안 매미들은 몸을 숨기고 함께 울었습니다 일 층의 휴게실에서 초록빛이 섞인 나무 그림자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복도에 늘어선 우산들이 말라가는 것을 보며 스물 언저리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

법 외 1편/ 송연숙

법 외 1편 송연숙 낙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네 넘어지는 순간 바닥이 되는 법을 가르친다네 한술 더 떠서 바닥을 몸속으로 구겨 넣는 법을 몸소 실천한다네 햇살이 바퀴가 되어 굴러가는 공지천 가에서 자전거 꽁무니를 잡았다 놓았다 하며 아이를 따라가는 사내 어느 순간, 두 손을 놓고 소리친다네 아빠가 잡고 있어 안심에 의지해 굴러가는 햇살 바퀴 잘 넘어지는 일은 툭툭 바닥을 털고 직립으로 일어서는 일과 같다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엄지손가락을 쳐드는 사내 넘어지고도 웃는 법 넘어지고도 자랑스러운 법 법이란 넘어지거나 서서 달리거나 모두 사람을 위한 것이라네 바닥은 부러지거나 깨져서 피를 흘리지 않는다네 -전문(p. 104-105) ------------ 봄의 건축가 소쩍새가 망치를 두드려 후동리 밤..

생각나무/ 송연숙

생각나무 송연숙 곱사등처럼 웅크린 시간을 편다 추곡약수터 가는 길 살금살금 다가가 두 눈을 가리고 누구게, 하고 물으면 화들짝 놀라 향기를 쏟아놓던 노란 스웨터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생강나무꽃처럼 그리움의 팻말을 건 사람 걸어 나온다 꼬리를 치켜세우며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선명하다 무릎을 접고 앉아 약수를 퍼 올린다 그만큼의 속도와 양으로 줄지도 넘치지도 않고 고이는 사람 무릎처럼 깨진 시간의 빈자리를 호호 불어준다 만병통치 약손으로 아픈 배를 슬슬 문질러 온몸 환하게 불 켜 주던 사람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우주이고 집이었다는 걸 늦봄처럼 깨닫는다 생강나무 손을 잡고 약수터에 나들이 온 봄 나뭇잎에 햇살 비벼 널며 파랗게 물오른다 이 소박한 나들이에도 꽃잎 웃음 터트리며 즐거우하던 엄마 서른아홉에서 멈춰 ..

카오스_망델브로 집합/ 이시경

카오스 망델브로 집합 이시경 왜 세상이 활활 타오르는지 알 듯합니다 우리는 실수와 허수로 이루어진 우주 위의 한 점 숱한 점들이 회오리 속에서 반복될 때 모습이 드러납니다 끝없이 나타나는 징후들 당신의 몸이 온통 전갈의 꼬리로 뒤덮여 회오리치고 여기저기 무진장 많은 뱀이 똬리를 튼 채 혀를 날름거리고 낚싯바늘 같은 당신의 손이 빈 곳을 찾아 번득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이들의 잘못이 순전히 우리 탓인 것은 어느 부분을 확대해도 비슷한 양태가 반복되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속성을 수식 속에 숨겼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이곳에 남긴 숱한 점들 그 속에 있는 불꽃과 가시 돋친 절규들이 자녀들에게 거듭 나타나는 것은 무슨 은유입니까 저 몰려오는 먹구름 속에는 또 어떤 상징이 숨겨져 있습니까 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