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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리 석불입상/ 조선의

분향리 석불입상 조선의 탑신에 이끼가 돋아났다 뜬 눈으로 천년을 꼿꼿이 선 석불 내부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나는 지금 없는 아버지와 동거 중이다 쓸모없는 돌로 무엇을 하려는지 세월을 되질하듯 어둠을 캐는 아버지는 더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불면을 흘려보냈다 수 세기에 걸쳐 깊어진 석불은 상처 입은 마음을 살피는 이 땅의 은자 가까워지는 걸음으로 속세를 향해 귀를 세우고 있다 속수무책 받아들여야 했던 아버지의 자학에서 빠져나왔으나 마음의 빈터마다 눈먼 남루가 극성을 부렸다 머리 꼭대기에 불을 밝힌 아버지는 타는 해를 삼켜버린 돌덩어리, 돌덩어리 숨 막히는 불안을 떨쳐내고 눈을 뜨니 몸 안으로 구름 같은 나비 떼가 날아들었다 생존의 늪을 건너는 참회의 눈물 한 방울로 아버지는 꺼지지 않는 목숨에 닿았다 -전문-..

송용구_김동명 시집『파초(芭蕉)』에 나타난 생태의식 연구(발췌)

파초芭蕉 초허 김동명(1900-1968, 68세)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76) -전문, 시집 『파초芭蕉』 ▶김동명 시집 『파초芭蕉』에 나타난 생태의식 연구(발췌)_송용구/ 문학평론가, 시인 김동명이 1936년 1월 『조광朝光』에 발표한 시 「파초芭蕉」는 시집 『파초芭蕉』(1938)의 표제작이 되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성교는 그의 논문 「김동명 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

애월, 서투른 결심 외 2편/ 서안나

애월, 서투른 결심 외 2편 서안나 슬픔은 소주잔처럼 손잡이가 없어 캄캄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벽마다 물결로 흩어졌다 삶은 돼지고기 한 근에 찬술 마시고 아버지는 북극처럼 혼자 춥다 습자지처럼 뒤돌아보면 자국만 남는 슬픔은 그런 것이다 봄날 새벽 나도 아버지가 마셨던 녹색 빈 술병을 본다 술병 속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병만 남은 사람의 몸은 고요하다 병 속에서 바람이 흘러나온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애월을 걸으면 물빛이 아버지의 눈빛과 닮았다 당신을 되돌아보지 않겠다는 서투른 결심을 한다 -전문(p. 30-31) -------------------------- 애월, 신장 위구르 고백은 고백할수록 더 참혹하다 우리는 우리의 추악함을 견뎌야 한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위구르족을 재교육 캠프 수..

봇디창옷*/ 서안나

봇디창옷* 서안나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꿇게도 하지만 봇디창옷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 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

의사 시인의 이중생활/ 김세영

의사 시인의 이중생활 김세영 시인으로 등단한 2003년부터 나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명함에도 의사 김영철과 시인 김세영 두 개의 이름이 적혀있다. 낮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저녁에는 문학모임에 갈 때가 많다. 서가의 책도 시인이 되기 전에는 대부분 의학 서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시인이 된 후에는 시집 등 문학 서적이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교우 관계도 동창이나 의사에서 시인으로 편중된 상태이다. 사람들은 의사이면서 시인까지 되었다고, 재주 많음을 부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훌륭한 의사도 되지 못했고, 유명한 시인도 되지 못한 얼치기 낭만주의자나 몽상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인할 때가 많다. 나는 매일 아침 6시부터 7시 30분까지 양재천 둑길을 걷는 운동을 한다. 걸어가면서 시상이 떠오르면 ..

에세이 한 편 2023.11.26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우대식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 우대식 오늘도 먼 데를 오래 바라보았으나 수평선에 눈을 맞추었으나 해가 제 몸을 다 우려 우는 다 저문 때에 대문을 닫네 사람의 말 중 가장 슬픈 단어는 사랑임을 되뇌며 묵은 나뭇잎 같은 마음의 문을 꼭꼭 여미네 눈물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일엔 죄밖에 없었을 것을 지는 메꽃에 마음을 두고 문을 닫아거네 사랑도 잘못 박힌 못을 뽑아버리듯 박힌 잔가시를 살이 천천히 뱉어내듯 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이 몽돌처럼 둥글어질 수도 있으련만 해는 지고 사람 많은 거리에 한 사람이 없네 온 몸이 눈물이라 물의 슬픔은 물의 울음은 드러나지 않네 - 『다층』 2008-가을호 / 전문 단평> 中: "눈물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일엔 죄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눈물에는 정화와 용서의 효능이 있..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

강제 이혼 외 2편/ 김우식

강제 이혼 외 1편 김우식 이혼 도장 안 찍으면 카드 사용 중지 자식 학원비 중지 생활비 중지 아빠, 나 어떻게 해 자식 때문에 도장 찍지 마라 아빠와 형편대로 살아보자 아빠, 손 서방 못살게 해서 도장 찍어 주었어 바보 가시내야 자식 때문에 참아야지 아빠! 자식은 계모에게 줄 수 없어 내가 키우기로 공인증서 받았어 착한 바보야 공인증서 보니 다 엉터리다 내가 변호사 선임했다 딸이 도장 찍어주고 아빠! 숨이 막혀 응급실에 가자 아빠! 애들 저녁은 학원 보내주고 김밥 사서 먹여줘 이 일을 어떻게 해 딸자식 불쌍해서 우짜고 어찌할꼬 홀애비 피멍 된 눈물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전문(p. 39-40) * 참조: 2009년 6월 25일 이혼 ----------------------------------- 어떻게..

매미/ 장재화

매미 장재화 여름을 대표하는 가수는 매미다. 게다가 줄곧 사랑의 세레나데만 부른다. 그뿐이랴, 하루 종일 노래하지만 목도 쉬지 않는다. 여기서 작은 궁금증 하나, 매미는 노래하는 것일까, 아니면 울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는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의 허물은 이라는 시를 남겼지만, 매미는 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매미소리는 짝을 찾기 위함인데 울며불며 사랑을 구걸할까. 구애求愛는 눈물보다 노래가 더 어울린다. 그뿐이랴, 매미의 텅 빈 허물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한다.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매미는 깍딱까딱 꽁지를 치켜들면서 노래한다. 그 소리를 들은 암컷 매미가 찾아와서 짝짓기를 하고, 짝짓기를 끝낸 수컷은 땅에 떨어..

에세이 한 편 2023.11.24

바다의 묵시록 외 1편/ 양해연

바다의 묵시록 외 1편 양해연 밤새 바다는 머리맡에 출렁였다 통증클리닉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쇄골이 드러나도록 어깨를 열어젖히시오 젖은 뭄이 말라가는 중에도 통증은 계속된다 새하얀 지붕을 투과하지 못한 햇살이 부서지고 잠기는 해수면 절제된 해안선을 따라 잊혀진 서사가 되살아나는 곳 굳게 입을 다문 바다를 어떻게 용서할까 그림자가 원을 그린다 후회와 체념에는 비슷한 강도의 한숨이 있다 파도에 휩쓸려 조각나버린 꿈처럼 새로 난 상처가 해풍에 쓰리다 -전문(p. 37) -------------------------- 달팽이 향수병 초원에서 달려온 달팽이는 향수병 때문인지 며칠째 미동도 없다 물조차 마시지 않는다 변덕스러운 조울의 포로가 되어 한없이 사랑스러운 촉수를 안으로 감추고 말라가고 있다 이마에 닿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