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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구도 외 1편/ 최휘

우리 집 구도 외 1편 최휘 우리는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갔어 나는 벤치에 앉아 이 생을 생각하고 있었지 우리 집 개 이름은 인생이야 늘 생을 뛰어다니고 냄새를 맡고 말도 잘 안 듣고 꿈속에서까지 짖어 대고 꼭 사람처럼 인생을 다 안다는 듯 킁킁대고 지랄이야 그래도 한 식구니까 간식을 내밀었지 가족은 나무 그늘에 서서 자꾸 뭐를 흘리면서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삼각형은 안정된 구도라고 배웠어 그런데 저 인생이 와서 꼬리를 흔들며 받아먹어야 너, 나, 인생이라는 삼각구도가 되는데 개놈이 저만치 서서는 내가 먹이를 내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목을 틀어 더 바깥을 보고 있는 거야 저 엉뚱한 시선이 닿지 않아 삼각구도가 약화되고 있어 인생아! 소리쳐 불러도 인생은 자꾸 저 먼 곳만 바라봐 가족은 왜 늘 나무 ..

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 최휘

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 최휘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애지중지하며 안고 뒹굴던 것이었다 그 얼굴 그 표정 그 손짓 그런 것들이 다 아리송하다 분명한 건 분홍색 헬로 키티는 아니라는 것 키티가 키티를 밀어 올리는 아침 나는 정체 모를 키티에 정신이 팔린다 컴퓨터 책장 유리창 너머 화장실까지 돌아다녀도 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 키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디에 숨었을까 이불 베개 침대 모서리 귤껍질까지 들추며 키티를 찾아본다 이상스레 입술에 착 달라붙는 키티 이름만 둥둥 떠다니는 키티 그러나 키티는 보이지 않는다 키티는 고유명사인가 키티는 무엇인가 키티는 힌트를 주지 않는다 숨 죽인 키티 지워진 키티 그런 느낌뿐 키티가 사라졌다 너무 덥다 히터를 껴안은 것 같은 바람이..

하루, 그리고 도꼬마리 씨/ 금시아

하루, 그리고 도꼬마리 씨 금시아 그대의 사주는 역마살입니까 흩어지는 여행은 늘 성급합니다 멀리 갈 요량으로 아무 다리나 잡았던가요 풀숲을 탈옥할 각오쯤은 물론 있었겠지요 온몸에 도꼬마리 붙어왔던 날, 운명은 날갯짓이었나요 깜짝 놀라 뒤돌아가는 절망에도, 옆길로 피해 달아나는 불빛에도 어김없이 달라붙길 좋아하던 그대는 막내처럼 붙임성이 좋았지요 빚쟁이들의 까칠한 추심같이 좀체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불행을 떼어내다 보니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한 생生일뿐이었군요 솜털 같은 촉은 이미 던져진 미늘이었나요 새장 속의 새는 분홍이었던가요 담쟁이 주파수 쪽으로 입술을 깨물고 글썽이는 도꼬마리의 여름 범람해서 흰 눈 속에서조차 번식합니다 속내 궁금한 달의 주기처럼 어떤 천적도 없어 흩어지고 마는 빛과 어둠 하루..

손쉬운 바다 외 1편/ 고명자

손쉬운 바다 외 1편 고명자 바다 보러 간다 집 앞이 수평선 전철역 바다 없는 지역 사람은 어디에서 연애를 하나 술을 또 어디로 가서 퍼마시나 울고불고 싶을 땐 어디에 숨어 고래감 치며 우나 파도를 붙잡고 엎어치기 메치기 하는 저 애들 수작을 봐봐 바다의 시간은 잴 수 없어 수십 년 된 근심에 싸인 얼굴이라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이물질인 듯 떼어 주려 했으나 떠밀려 온 미역 줄기를 주워 내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그 앞에서 슬쩍 얼굴을 치웠다 오늘 바다는 유리 한 장 눌러 놓은 것 같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삼십 미터 파도가 나를 덮쳐 순전히 바다의 일이라 떠넘겨도 되는 오늘 같은 아무렴 쓴물 올라오는 속병도 고칠 수 있으려나 손바닥 한가득 바다를 퍼 올린다 모래 한 알을 위해 물결도 애쓴다 고등어 ..

먹이사슬을 위한 랩소디/ 고명자

먹이사슬을 위한 랩소디 고명자 재송 기슭의 나는 우리 동네 가장 질긴 뿌리다 그래, 먹어 치워 봐라 나를 식물들도 오월이면 몸싸움을 한다 은근슬쩍 얼키설키 초록이 질펀해지면 귀 어두운 새도 말문이 터진다 넝쿨 식물이 유리창을 뚫겠다 한겨울 눈 속에도 꼿꼿하던 나무들 넝쿨에 휘감겨 시들어 간다 누군가 집을 허물고 떠난 빈터에 산이 어적어적 내려왔다 푸른빛 긴 혀를 뽑아 허공을 쑥 핥아대니 고양이 풀씨 칡넝쿨 벌레 딱새 온갖 것이 튀어나온다 눈 밖에 난 요괴처럼 날고 기고 먹고 먹히고 눈물 콧물 재채기 오월의 아수라다 마당에 산맥이 들어섰다 읽던 장자를 "탁" 덮었는데 꽃가루 분분하다 집 꼴이나 사람 꼴이나 그렇고 그래서 톱을 들었다 등꽃 대궐 수십 채 썰어댄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위의 시는 자연을 ..

참, 눈물겹기도 하지/ 김밝은

참, 눈물겹기도 하지 선유도에서 김밝은 밀어내도 밀어내도 마음만은 무작정 아득해져서 홀로 선 바위도 섬 하나 떨어진 꽃 한 송이도 한 그루 나무의 마음이 되지 비를 붙들고 걷는 사람을 꼭 껴안은 바다는 열어젖힌 슬픔을 알아챘는지 흠뻑 젖은 그림자로 누워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섬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참, 눈물겹기도 하지 -전문(p. 113) ---------------------- * 시동인 『미루』(1호_신작시)에서/ 2023. 11. 11. 펴냄 * 김밝은/ 2013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술의 미학』『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아이스아메리카로 주세요/ 김선아

아이스아메리카로 주세요 김선아 그녀는 연년생 남동생이 태어난 날 호적에 올랐단다. 남동생의 쌍둥이 여동생으로. 비로소 실존인물이 되었단다. 태어나자마자 세상 떠난 첫아들 장손 자리에 그녀를 올리지 않고 미적미적했더란다. 올 백을 받아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더란다. 시집가서 내리 아들 셋 낳자 난생처음 금반지 하나 받았단다. 열셋에 고깃집 불판부터 닦았다는 그녀 맛집 주인 되어 가장 노릇 쩍지게 하는 이날 입때까지 찬밥, 찬바닥, 찬물, 찬바람. 열탕은 질색이란다. 수증기로 증발해 세상에 없는 가상인물 될까 봐 잿가루로 풀풀 사라질까 봐. 지금도 남동생에게 오빠, 한단다. -전문(p. 102-103) ------------------------- * 시동인 『미루』(1호_신작시)에서/ 2023. 11. 1..

겨울/ 황강록

겨울 황강록 눈 덮인 오후에 너에게 편지를 씁니다. 세상은 잠 속인 것처럼 고요합니다. 내 이야기를 하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네 이야기를 하려니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얀 눈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아프거나 춥지 않습니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던 습관이 어느새 고통을 무시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반성이 됩니다. 만약 이 피가 나의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문득 편지를 쓴다 해도 너에게 가 닿을지 걱정이 됩니다. 바다에 눈물을 떨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방울의 짠물이 바다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눈으로 뒤덮인 온통 하얀 침묵이 나로 하여금 너를 떠오르게 했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느끼게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제 너를 만났는지 네가 누군지도 온통 하얀·..

김정현_한 연금술사의 벤야민적 써나감(발췌)/ 처음으로 : 황강록

처음으로 황강록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어색한 일은 될수록 피해 왔다 아버지가 밥을 차려주었고 나는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 이었다. 가급적이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고··· 그렇게 어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일 아버지는 늙은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했다. 무척 오랫동안 그 불편한 기계로 험한 일들은 해왔었나 보다. 당연히 아버지 혼자서 밥을 찬찬히, 맛있게 차려 본 적이 없기도 할 테고······ 아버지가 차린 맛없는 밥을 우린 말없이 먹었다. 원래 아버지와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오죽하..

오형엽_귀의 이동과 눈의 응시,···(발췌)/ 응시 : 정재학

응시 정재학 빌딩들이 모두 길을 막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출구를 찾아 맴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죽은 쥐들이 밟히는 것일까 건물의 창문마다 혀가 날름거린다 귀가 무거워 쓰러진자 문을 든 사람들이 귓속에서 걸어나왔다 어떤 문을 열어도 납으로 된 이빨들이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의 오려진 입술이 떨어진다 나는 피가 흐를 때까지 얼굴을 아스팔트에 문질렀다 새들이 노래하지 않을 때마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약물을 끊지 못하는 아이들이 정지한 자동차의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왜 저 흐린 풍경이 이토록 눈부신 것일까 내 온몸에서 눈동자가 돋아나기 시작하고 맑은 하늘에서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빌딩 꼭대기에서 배고른 부리를 가진 새 한 마리 딱딱하게 나를 바라본다 눈들이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사방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