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장적_2045, 열린사회와 그 적들 : 한반도···(발췌)/ 실향기 : 박훈산

검지 정숙자 2023. 12. 5. 02:44

 

    실향기失鄕記11)

 

    박훈산(1919-1985, 66세)12)

 

 

  눈을 뜨면

  또 내일이란 것이란다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새겨진

  징그러운 오늘이

  내일로 이어간다

 

  앞으로 나아가는 바른 자세는

  비틀거리는 걸음 틈에

  가로막혀

 

  연륜과 더불어

  빨갛게 쏟아온 피

  인생은 병들었다

 

  찢어진 가슴 한 귀퉁이에

  따뜻한 정을 얹은

  보드라운 손길이!

 

  싱싱한 바람을 따라

  훌훌 떠나고 싶구나

  어디든 그만 가고 싶다

 

  내일이란

  오늘로 되도는

  어긋난 바퀴에서

  정말

  눈을 가리고 싶네

     -전문-

 

  ▶ 2045, 열린사회와 그 적들 : 한반도 문화창발에 부쳐-2(발췌) _장적

  아침에 눈을 뜨니 '내일이라는 것'이 시작되는데, 그 묘사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릴적, 소풍날 아침에 배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동편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날씨가 맑습니다. 그때의 그 감격. 그때는 아마도 눈앞의 아침을 '내일이라는 것'으로 부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기쁜 오늘이지요. 하지만 시인의 내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오기는 왔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는 '그냥 내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날입니다. '징그러운 노늘'일 뿐입니다. 현실을 피해 '싱싱한 바람을 타고 어디든 훌훌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마지막 문장이었습니다. "내일이란 오늘로 되도는 어긋난 바퀴" 이 문장에서 저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전망 부재.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아픔입니다. (p. 시 245-246/ 론 246-247)  

 

  11) 박훈산 , 『날이 갈수록』, 철야당, 1958.

  12) 박훈산(1919-1985, 66세)은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유상裕相. 1941년 일본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한국에서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는 유치환과 함께 예총 경북지부를 창립하여 초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대표 시집으로 『날이 갈수록』과 『박훈산 시선집』이 있다(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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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이후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지나왔다. 길이 달랐던 만큼, 남북한 시인들의 눈에 포착된 풍경도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형식과 내용에서 너무도 달라진 시들. 남과 북의 달라진 시들을 함께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너무 익숙한 방식이면 지루할 수 있어 좀 더 특별한 남북한의 시를 살펴보고자 했다. "2025, 열린사회와 그 적들: 한반도 문화창발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2045년 한반도에 미리 가보았다. 그대 그리스를 연구하는 학자의 눈을 빌려, 한반도의 지난 100년을 돌아보는 형식이다. 그 중심에 남북한의 시詩가 있다. 과학법칙상 이 돌아보기는 다가올 날들에 대한 내다보기일 텐데, 2045년 한반도 문화창발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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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2022-여름(38)호 <POSITION · 6/ 한반도의 시> 에서 

  * 장적/ …?, 시집『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지나는 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