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내장 속에서만
나희덕
괴혈병에 걸리면 더 이상 고기를 씹을 수 없게 되고
북극에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북극에서는 죽어도 썩을 수가 없다지
유빙들 사이로 떠다니며 영원히 잠들 수 없다지
죽으러 갈 수 있는 곳은
북극곰의 내장,
따뜻한 내장 속에서만 천천히 사라질 수 있을 뿐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업고 가서 얼음 벌판에 내려놓고
어머니를 곰에게 먹이로 바치고
어머니는 어서 가라, 아들에게 손을 흔들고
아들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언젠가 자신이 묻힐 곰의 캄캄한 내장 속을 생각하고
이글루 속에서
이글루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이도 자라고
물개나 바다표범을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곰을 잡아 곰고기도 먹지만
이누이트족이 곰의 내장을 먹지 않는 건 그래서일까*
더운 그것이 어머니의 무덤인 것만 같아서
아직 그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전문(p. 218-219)
* 실제로는 곰의 내장에 치사량의 고농도 비타민A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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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22-여름(38)호 <POSITION · 5/ 집중조명/ 근작시> 에서
*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파일명 서정시』『가능주의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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