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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날아간다/ 안이숲

바닥이 날아간다 안이숲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뒤집어지면 가느다란 잎맥에 바닥이 드러난다 바닥의 눈가에는 밀물이 바닥의 이마에는 썰물이 철거되는 마른 잎에 샌드위치 판넬을 실은 여객선 한 척 표류하고 있다 길항하는 돛폭처럼 나는 자주 낮 꿈을 꾸었었지 어디가 가장 낮은 바닥일까 떠나려는 날개는 바닥에서부터 가벼워지고 더 가벼워지면 가을이었다 바닥이 되기 전에 바닥이 물고 늘어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 수평선을 밀어버릴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목수의 집으로 숨어버릴까 바람이 바닥의 틈새를 흔들고 간다 자, 날자. 지금부터 떨어지는 비상飛翔이 되어 보는 거야 저만치 바닥이 떠날 준비를 한다 다 버린 자세는 다 얻은 자세보다 가볍다 -전문(p. 98-99) ♣ 시작노트 한때는 어떻게든..

꾸러미를 내려놓고 외 1편/ 배세복

꾸러미를 내려놓고 외 1편 배세복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슬그머니 놓았는데도 방바닥이 제법 울렸다 벌써 저녁상 주위로 모두 둘러앉아 있었다 고갤 돌려 그가 물었다 병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계집애로 생겨났어야 하는 놈이 사내로 태어나서 고생이다 병이 우물거릴 때마다 자주 듣던 말이 쏟아졌다 숟가락질을 멈추고 그가 급히 다가왔다 시로 가득 찬 문집이었다 법대를 가야지 글을 쓴다고, 내가 그렇게 당하는 걸 보고도? 굶어 죽기 딱 좋은 놈들이 시 쓰는 놈들이라고 그가 한껏 소릴 높였다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다가 입을 동그랗게 말면서 어떤 단어를 거칠게 되뇌었다 병이 시를 써서 가져갈 적마다 어깨를 두드려 주던 지도교사의 이름이었다 -전문(p. 84-85) ----------------------------- 이정..

추녀는 치솟고/ 배세복

추녀는 치솟고 배세복 수리조합장 집은 방죽 아래 있었고 하늘로 치솟는 추녀를 가졌다 해는 언제부터 저기서 빛났나 다른 이들은 근처 논밭에서 일했다 길을 걸을수록 뜨거워지는 정수리 방아깨비는 끊임없이 방아질했다 글쎄 요즘에도 머슴이 있다네요 갑은 천천히 머슴 머슴 중얼거려 봤다 꼭 일소가 밭을 갈다가 멈추며 우는 소리 같았다 해는 타올라 저수지 윤슬을 바라보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지는 눈알 그는 이 길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안장은 꺼지고 체인은 늘어났다 저쪽은 물귀신이 있다는 곳이다 귀신은 왜 사람들을 데려갈까 누구는 데려오고 누구는 데려가고 정말 매미를 잡아 날개를 떼도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왜 산 것들은 죽기 전까지 우는 것일까 갑은 손그늘을 만들어 봤다 여전히 땀은 솟아났다 달걀꽃도 지쳤는지 풀어진..

날 외 1편/ 김윤

날 외 1편 김윤 지는 해를 보다가 나도 저물다가 주머니에 손 넣으면 조선 칼 하나 있다 날은 닳아서 서러운 아무 것도 베이지 않고 상처는 질겨서 찢겨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자꾸 사랑이라고 항변할 때 칼에 독이 있다 목숨 바꾸어 베어 낼 무엇이 틀림없이 내게 있었던 거다 날이 제 힘을 다하느라 상했다 이제 벼리지 않을 거다 큰 절 아래 골목에 오래된 대장간이 있어서 젊은 장인이 금방 나온 쇠를 허공에 몇 번이고 세워보면서 흰 날을 일으켜 붙잡는다 칼긑을 담금질하는 치밀한 시간 꽃이 지고 봄이 가고 날 끝에 파랗게 독이 섰다 베어야 할 것들이 문득 다 사라졌다 -전문(p. 16-17) ------------- 순장자 거긴 언제나 밤이어서 그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귓바퀴 뒤쪽 물렁뼈를 타고 칠흑 같은 슬픔..

지장(地藏)/ 김윤

지장地藏 김윤 빗재 넘어 푸른 생강 밭 사이로 걸어가면 삼거리 커다란 소나무 아래 쉬는 듯 앉아서 올겨쌀과 엿을 파는 할머니가 있다 소쿠리 속 같은 대밭 안에 오래된 지장암이 있다 유리상자 안 작은 닫집 아래 금박을 입힌 관세음보살의 고혹적인 초록색 눈썹 삼거리에서 서쪽 길로 들어서면 지장보살이 지옥문같이 서 있을 거다 꽃 지고 바람 불고 저녁이 와서 두 손이 차다 내 손바닥에 무엇이 있을까 어떤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나를 들고 여기까지 걸어 온 일을 다 잊어버렸다 돌아서 내려가면 나루터가 있을까 -전문(p. 46-47) 해설> 한 문장: 김윤 시인의 시집 제목은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이다. 이 구절은 시 「지장地藏」에서 왔다. '지장'은 지장암에 있는 지장보살을 가리킨다.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

엄마가 그린 만다라▼/ 정끝별

엄마가 그린 만다라▼ 정끝별 눈이나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적 나도 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티벳 승려들은 돌을 갈아 그 가루를 물들여 그림을 그린다 갈수록 좁아지는 대롱에 색색이 돌가루를 넣어 대롱 한끝 한끝에 숨을 불어넣는다 가시인 듯 촉수인 듯 대롱 끝에서 피어나는 다반사의 만화경 거기서 누군가 울고 있다 나도 때때로 눈물로 그림을 그린다 죽어가는 엄마를 요양병원에 두고 올 적 엄마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 자주 와! 몇 명의 승려가 몇 날 며칠의 기도처럼 그려낸 그림은 그대로 쓸어 담겨 강물에 뿌려진다 돌가루에 숨을 불어, 없던 꽃을 피워냈으니 단숨에 쓸어, 없던 자리로 되돌려놓았으니, 그래 엄마! 눈이든 물이든 눈물이든 모래든 돌가루든 뼛가루든 고관절을 잃고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

빌라/ 전명옥

빌라 전명옥 이 빌라는 그대가 대취를 해도 오차없이 찾아들었던 집이었다 어느 이름에 세들어 살다 느닷없이 쫓겨난 일은 있었어도 그의 세간살이들, 그가 바른 벽지들 그가 설정한 현관문 비밀번호에서조차 느닷없이 쫓겨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천 길 낭떠러지를 건너와 계약한 집 농협 대출 창구에서 거북목이 되어서야 겨우 잔금을 치를 수 있었던 집 이사한 첫날 아침 처음 찾아온 햇살을 붙들고 고맙다고 하염없이 울었던 집 전세로 얻은 빌라가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야멸차게 그이 손을 뿌리치고 망망대해를 유유히 도망치고 있었다 결국, 거실에 누웠다 이렇게 큰 관棺이 있었다니 너저분하게 널린 살림살이가 천 년을 빛낼 부장품 같았다 그는 이 집의 영원한 주인이 되었다 편안했던 처음으로 흘러갔다 -전문(p. ..

모과꽃 외 1편/ 한현수

모과꽃 외 1편 한현수 모과꽃이 피는데 입안에 침이 돈다 머리맡에 모과가 놓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난다 입맛 잃은 어머니는 말없이 웃고 모과꽃처럼 웃고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모과나무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나비가 모과꽃 밖으로 날아간다 모과꽃을 보며 아들은 자꾸만 입안에 침이 돌고 아들은 하고 싶었던 말을 놓친다 모과꽃잎 벌어지는 것보다 어머니의 발걸음이 더디다 걸을수록 어머니는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표정이 기울어지고 언어가 기울어지고 어머니는 웃는다 모과꽃처럼 웃는다 어머니는 모과나무를 닮아가고 모과꽃은 웃고 아들은 하고 싶었던 말을 놓친다 모과꽃잎 떨어진다 -전문(p. 82-83) -------------------------- 사과꽃이 온다 어느 산골 마을 농부는 사과꽃이 핀다..

메아리/ 한현수

메아리 한현수 치매 앓는 어머니 입 앞에 수저가 멈추어 있다 머리 희끗한 아들이 먼저 입을 크게 벌린다 아 어머니도 입을 벌린다 육십 년 넘어 되돌아온 당신의 메아리를 먹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어렵지 않게 그 시적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숟가락으로 미음을 떠먹여주며 "아 "하는 소리를 발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육십 년이 지나 어머니는 쇠락하여 수저를 들 힘도 없는 연약한 아이처럼 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자식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어머니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고 있다는 것이 전체적인 시적 구도이다. 감동적인 점은 육십 년 전에 어머니가 자식에게 했던 "아 "하는 소리가 육십 년이 지난 지금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육..

저녁에 박하▼/ 정혜영

저녁에 박하▼ 정혜영 흰 커튼으로 무얼 가릴 수 있을까 휘발된 아침이 돌아오면 처음인 듯 들어오는 빛 그날 아침 얼굴은 너무 차가웠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나보다 나를 더 간섭하는 것 새 연필, 새 노트, 손대지 않으면서 자꾸만 새 것을 사고 있다 우주 공간 어디선가 네 목소리가 낯선 행성을 돌고 있다 창을 열면 박하 향이 공기 중에 머물다 가라진다 날이 밝으면 사라지는 새벽노을, 항상 곁에 있을 것만 같이 봄이면 푸른 들판에서 불쑥 손 내미는 것들 환한 대낮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별들은 뭘까, 몸을 가진다는 것은 이 창백한 별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떤 나라를 알지 우리가 가보지 않은 어떤 나라, 거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곳이지 왜 우리는 캄캄해져야 별을 볼 수 있을까 이미 폭발했거나 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