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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시_이승희)/ 에세이 : 강재남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이승희 허리쯤에서 꽃 무더기라도 필 생각인지 새삼 잊었던 기억이 몸이라도 푸는지 녹색의 살들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팽팽해지는 오후 녹색의 말굽들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며 횡설수설 나를 잡아당긴다 슬플 겨를도 없이 구석을 살아온 내게 어떤 변명이라도 더 해보라는 듯 여름은 내게 베고 누울 저승을 찾으라 한다 구름 사이로 모르는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다 누구의 유족인가 싶은데 문상 차림치고는 너무 설레는 표정이다 큰 나무 뒤에서 혼자 늙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엇을 먹는 건지 게워내는 건지 나는 못 본 체 지나간다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어디쯤에서 그늘을 오려내고 그 자리에 숨어 이 계절을 지나가야 하는지 오려낼 자리마다 더 깊은 변명이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썩어가자..

에세이 한 편 2023.12.09

삼학년(시_박성우) ⦁ 헛나이테(시_양진기)/ 에세이 : 강재남

삼학년 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전문- ▶♣◀ 행간마다 동화가 빼곡합니다. 글자를 모르던 나이에 그림만으로 충분했던 동화 말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 주변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고요. 달빛이 부서지는 밤에는 욱수수 잎이 저들끼리 부대끼는 소리를 냈지요. 초록의 잎들은 초록의 소리로 깊은 밤을 이야기했습니다. 알곡이 익어가는 소리가 별자리를 수놓았지요. 이렇게 동화는 책에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겁니다. 그것이 아름답든 서럽든 말입니다. 어떤 시는 시인의 이름만으로 가..

에세이 한 편 2023.12.09

떠도는 빗방울을 찾으러 갑니다/ 신새벽

떠도는 빗방울을 찾으러 갑니다 신새벽 비릿한 파도가 지나간 갯벌 내 손바닥엔 검은 구름이 꼬깃꼬깃하고 얼굴엔 비의 허물들이 붙어 시야가 엉킨 빗속을 난 혼자가 되어 걷는다 낡은 기둥처럼 서 있던 당신의 표정이 떠오르고 눈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미로에 갇힌 듯 몽롱한 뒷모습이 아른거릴 뿐 붉은 칸나의 얼굴로 풀어진 감정을 빗속에 푹 담그고 선을 넘을 듯 말 듯 캄캄한 목소리로 물컹거리는 한숨을 나에게 불어넣는다 검은 우울이 매일 당신을 얼룩지게 만든다고 혀 밑으로 지나는 금이 간 문장들을 뱉어놓고는 기척도 없이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어젯밤 찢어진 번개를 내려놓고 가버린 바닷가 허공에 한껏 부풀려진 당신의 독백도 사라진 지금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 웅크리고 토악질하며 선미船尾에 널브러져 있던 아주 오..

느닷없이/ 유현숙

느닷없이 유현숙 디지털 메트로시티의 작은 카페 창가에 앉으면 낭만적인 밤이 된다 달빛에 더 아름다운 당신이 된다 카페를 나서 달무리를 이고 걷다 보면 상하좌우 나를 끌고 다니는 저 무엇 어느 저녁에 본 명동성당 뒷벽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또 하나의 만다라여서 밤늦도록 성당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던 적 있다 그대라는 별 그 행성에 닿기 위해 묵주를 굴리던 밤이었다 다시 홍제천 돌다리 위에 서면 물빛은 도심 차량들의 밤 질주에도 굳건히 제 빛을 지킨다 힘이 들어가면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 문장을 깨닫지 못해 아팠다 매시간 지나는 밤 기적 소리는 둥글 자라는 달을 누르고 배고픈 수형자는 최초의 발자국을 들고 갈 곳 없어 머뭇거린다 -전문(p. 83) ------------------------- * 시동인 『미루』(..

니스*/ 하두자

니스* 하두자 역에는 카레이스 경주가 있는 모나코로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고 때때로 파리 모나코 칸 마르세유로 가는 이들을 위해 플랫폼은 잠깐잠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나는 역에서 나와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로 갔다 차양 아래서 파도에 귀를 열어놓았을 땐 새 한 마리 바다 한 귀퉁이를 물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온통 웃고 첨벙이는 사람들 강렬한 햇살 아래서 식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사람들 이곳은 날씨보다 사람들이 먼저 맑게 개었고 바다로 나갔다 되돌아온 사람들은 젖은 몸으로 파도를 밀며 누워있었다 휘저으면 손에 묻는 따가운 햇살이 내 등을 타고 흘러내릴 땐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잠깐 일었지만 손에 묻은 모래를 털듯 흰 물보라 일으키는 파도로 향했다 한동안 나는 마음의 궤적까지 빠짐없이 기록되는 이곳에 머물..

모슬포 외 1편/ 최재영

모슬포 외 1편 최재영 사람이 살지 못하는 못살포라 했던가요 몹쓸 바람 그리 불어 수만 년 전 누군가는 그리움을 꾹꾹 찍어 화석이 되었을까요 그때마다 가슴 들썩이는 심호흡은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에 가 닿았겠지요 한라를 넘어온 북서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내 희고 아름다운 등뼈는 더욱 눈부시게 빛이 났겠지요 끝까지 내몰리고 나서야 다음 생도 도모할 수 있는 법 결마다 서귀포의 파도를 잠재우느라 절벽은 제 가슴 내주었겠지요 서쪽으로 돌아 돌아서 오면 곱게 빗은 머릿결처럼 모래가 아름다운 바닷가 모슬포 등 푸른 날들을 뒤척이면 늑골마다 모래의 지문이 선명해요 지나는 노을이 가만 등을 토닥이는지 날카롭게 여울지는 한 생애 울컥이며 자꾸 푸른 물을 쏟아내고 있네요 -전문(p. 126-127) -------------..

붉은, / 최재영

붉은, 최재영 노을이 안마당까지 들어와 판을 벌인다 기왕지사 엎질러진 한 시절이라고 파도는 후렴구를 되풀이하며 울컥거리고 새 떼들 제 안의 깊이를 가늠하며 붉게 젖은 가슴으로 한 생을 횡단해 간다 어쩌면 당신에게 이르는 길은 끝없는 항해와 같아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건너가야 할지도 모른다 노을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파도가 밀려드는 긴 눈썹 같은 해안선을 생의 내륙까지 밀어붙인다 소금기 가득한 자서전을 기록하는 내내 잠시 감았다 풀어지는 눈꺼풀의 기척만으로도 해안선은 밤새 뜨거울 것이다 새들의 노래를 끊임없이 분만하는 물거품 붉음이 아니고서는 노을을 거두어 돌아가고 각혈 같은 울음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서로 눈물겨운 호흡을 주고받으리 온통 붉은 울음 범람하는 바닷가 그리하여 눈시울 붉힌 해안선을 읽어내..

가오슝 식당의 친절한 여주인/ 최종만

가오슝 식당의 친절한 여주인 최종만 불광산 불타 기념관을 둘러보고 가오슝 '보얼 예술특고'를 보러 가려고 택시를 불렀다. 일행이 5명이라 일반택시가 아닌 6인승 택시를 불러야 했다. 사실은 처음 이곳으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이곳에 가서 차량을 렌트해서 다니자고 했는데 우리나라와는 국교가 단절되어 렌트가 되지 않아 택시로 이동을 해야 했다. 금년(2019년)이 아내의 8순이라 아들 삼 형제와 함께 타이완의 남부 도시 가오슝(타이완 & 대만)을 여행 중이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장개석은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으나 공산당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다가 공산당(모택동)에 밀려(1949년) 결국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중화민국은 우리나라와 건국 때부터 국교를 유지해 왔으나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1992년..

에세이 한 편 2023.12.06

동행 외 2편/ 함기석

동행 외 2편 함기석 우산도 없이 빗길을 가는데 누군가 다가와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곁눈질로 보니 희망이다 그도 온몸이 빗물에 젖어 떨고 있었지만 처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깨우친 자의 얼굴처럼 고요했다 어딜 가는 길이오? 내 물음에 희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이 진흙탕 빗길이 끝나는 곳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소 그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오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졌다 내리막 빗길 따라 코스모스가 따라 걸었다 나는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길이 끝나는 강가를 향해 계속 걸었다 -전문(p. 121) ---------- 시인 모든 꽃은 예언이다 불꽃들 다 지리라는 침묵이 활짝 꽃피자 모든 말이 시들었다 -전문(p. 103) ------------- 시실리 시실리에 가 보셨나요? 바람이..

우리 시대의 시/ 함기석

우리 시대의 시 함기석 시청광장에서 처형된 사형수다 그녀의 눈동자에 고인 12월의 밤하늘이고 목에 걸린 인조 목걸이다 육교 계단에서 추위에 떠는 고아들 녹슨 빗속을 최면 상태로 걸어가는 부랑자들이고 젖은 불빛이다 낫들이 활보하는 도시 거리엔 웃음 없는 무녀의 피가 떠돌고, 우리의 얼굴은 죽음이 화인火印으로 남긴 검은 판화들 잠들면 종이가 자객처럼 내 눈을 베는 소리 들리고 고열과 오한 사이에서 나의 펜은 눈물을 앓는 새 -전문- 해설> 한 문장: 개인의 고달픈 삶과 또 그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성에 주목하는 함기석 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행위로서의 시 쓰기이다. 그의 시세계가 무한한 운동성을 가진 진행형이라는 점은 이미 살펴보았다. 부연하자면 함기석의 시어는 언어적 차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