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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이데아/ 양해연

자본 이데아 양해연 무지개를 좇아 산을 넘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낭만주의가 지나갔다 부패한 살빛의 대지와 뱀의 몸짓을 타고 흐르는 강물 저편 가느다란 황톳길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간다 자연주의가 지나갔다 서울에 서울타워가 있다 파리에 에펠타워가 있다 런던에 런던타워가 있다 혁명의 시대가 지나갔다 바르셀로나 광장 가우디의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등잔의 램프 같기도, 풍차의 날개 같기도 한 그의 가로등을 도처에 세우려던 계획이 비용 문제로 취소됐다 신도시 예정지를 남몰래 사들여 용버들을 심은 사람은 왜 하필 용버들을 택했을까? 물을 정화하고 해열과 진통의 효능을 가진 버드나무를 마지막 자본주의가 지나가는 중이다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문예사조의 역사는 고전주의→ 낭만..

수렵채취의 기억/ 김원상

中 수렵채취의 기억 김원상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스웨덴의 박물학자 린네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생물 분류학으로 인간은 어디에 속할까요 시험에 나온다고 잊지 않으려고 외운 종, 속, 과, 문, 강, 문, 계,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책상에 고꾸라지던 아이, 가방 속에 책은 없고 이상한 공구들만 넣고 다니던 놈, 교실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며 어디론가 날아가 고래 사냥을 꿈꾸던 녀석,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챙겨 복도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쏜살같이 내달리던 친구, 그들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종, 뭐 이런 것이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요 린네에게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얻은 인류는 땅따먹기 놀이도 구슬치기 놀..

이오장_미학적 존재로 이해되는 시의 존재 의미···(발췌)/ 갈대 : 백옥선

갈대 백옥선 작은 씨앗 어두운 땅속 그늘은 한아름의 무거운 짐이다 세상 경계 저만치 보이는 틈새 세월 따라 푸른 잎 속 애벌레는 자라고 풍성하게 자란 이파리들 한여름 밤 이야기가 된다 산국 사이 귀뚜라미 울음도 성하거니 숨어 우는 바람 소리 아득도 하여 창공의 철새인 양 나도 따라 울어본다 가을 깊은 호숫가에 쓸쓸함이 피어올라 하이얀 갈대바람에 포자가 무진장 날리운다 -전문- ▶ 미학적 존재로 이해되는 시의 존재 의미는 예술성이다(발췌) _이오장/ 시인 · 문학평론가 세상에 갈대를 노래한 시는 많다. 역사 속에서도 많고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다. 왜 이렇게 시인들이 갈대를 노래할까. 갈대가 가진 이미지 때문이다. 고독의 대명사, 흔들림의 전설, 사람과의 인과관계, 생활의 필수품 등 갈대가 사람과 맺은 관..

블록체인 외 1편/ 김은

블록체인 외 1편 김은 나는 도시의 얼굴 블록의 고리다 칸칸마다 내 몸속에 들어와 사람들은 블록체인을 만든다 화성의 사나이는 얼굴이 불그레한 달빛을 그려 넣고 금성에서 온 여자는 모딜리아니 모델처럼 색칠을 하고 분장한다 꾸벅거리며 조는 아기와 엄마 어젯밤처럼 단꿈을 꾼다 스스로 손바닥 속으로 들어가 히히거리는 젊은이들의 눈빛은 모두 우물에 빠져 있다 절뚝거리는 노인들은 둥지를 벗어난 철새가 되어 서열의 눈치만 본다 잠시 쉬는 동안 문이 열리면 오르락내리락 블록의 체인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블록체인이 만들어진다. 내 몸속 짐짝들은 하루도 쉬는 적이 없다 어두운 터널 속 바람의 벽을 헤치고 오늘도 난 달리고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모른다. 나는 오직 종착역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전문(p. 90-91) ----..

불면 6/ 김은

불면 6 김은 어둠의 밤, 산여울 그림자에 비치는 빛 하나 먼 행성 하나 앉아 있다 주소 없는 먼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 듯 미소가 낯설지 않다 희미한 옛 그림자 속 가슴 설레게 한 그리움 교신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짧지만 함축성이 매우 강한 작품이다. 불면의 감옥에서 시적 화자는 "산여울 그림자에 비치는 빛 하나"를 눈앞에 그리며 그것이 곧 하나의 "먼 행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고 "주소 없는 먼 그곳"에서 익숙하고 친밀한 "미소"를 읽어낸다.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그 미소는 물론 먼 행성이 보낸 것인데, 시적 화자는 그 행성이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그 행성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과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달팽이는 밤을 건넌다 외 2편/ 김이담

달팽이는 밤을 건넌다 외 2편 김이담 자주 발을 멈추고 내 몸의 동굴에 나를 숨겨 밤을 건넌다 잠망경 같은 두 뿔을 세우면 덜컹거리는 바람의 창문들 이명으로 번뜩이는 소리, 소리들 불안은 끈적이는 점액으로 흘러내리고 어디선가 가시꽃으로 돋는 물방울의 향기 더듬더듬 혀끝에 닿는 길을 끌면 나를 베는 칼날 같은 풀잎들 죄어오는 허기를 핥으면 축축한 어둠이 끈적인다 목구멍에서는 컹컹 개 짖는 소리 또 어디에 나를 숨겨야 하나 빈 몸으로 무겁다 -전문(p. 21) ---------------------- 금계리에서 일박 골골골 물소리를 따다 갔더랬습니다 산 같던 사내의 병든 몸을 안고 살았다는, 더는 기도밖에 해 줄 것이 없던 그, 새처럼 날아간 텅 빈 하늘 뚫린 가슴만 빈 집으로 벗어놓고 떠났다는 마을은 밤의..

헨드릭 하멜, 당신을 보았다 외 1편/ 한경용

헨드릭 하멜, 당신을 보았다 외 1편 한경용 당신의 선단, 선인장처럼 초록이다 대정현 차귀진 아래 대야수 해변이 눈부시다 이방인의 표류는 내 안의 바다를 넓혔다 수평선은 언제나 그리움을 동반한다 새로움을 찾는 자에게만 섬은 열린다 나와 당신, 문무文武 동의어일 뿐 어서 와라, 우연의 역사여, 당신의 표류기에 쓰일 기근의 섬 항해는 누군가와 겨루는 것이 아니고 이역 하늘 아래 자신을 향해 저어 가는 것 관원들과 하께 당신들을 구조한다 세상은 물 한 모금이면 선하다 당신들이 온 제주 해역 어린 시절 '해가 뜨는 쪽은 아름답다'라는 환상의 약속이다 헨드릭 하멜, 내게 넓힘을 주셨으니 경외하노라 분노, 방탕, 광기, 나도 그 모든 재난을 안고 떠나고 싶다 이 섬을 안고 정신을 더듬으며 순수의 폭을 넓혀 가 보자..

이 세계의 갇힘을 떨쳐 버리고 싶네/ 한경용

이 세계의 갇힘을 떨쳐 버리고 싶네 한경용 길할 길 복조 길조吉祚 내 이름처럼 되지 않는 세상 흉년과 기근에 관리들의 수탈이 날이 갈수록 심하네 검은 보리만 남겨 놓고 검은 섬을 떠나는 사람이 많네 "삼대 종ᄉᆞ 하던 종은 새 대엔 나서 삼 년을 사난 먹던 밥을 선반에 놓고 입던 옷을 대회에 거난 보리방에 물 섞언 노난 여히 알로 산 도망ᄒᆞᆫ다 유월방에 제우더라 나일 도욀 ᄒᆞ나이도 엇다"* 장판 삼촌은 번찍한** 날, 고기 잡으러 가서 경상도나 전라도 해안으로 간다고 말하곤 돌아오지 않네, 안 삼촌도 같이 갔네 대마도나 중국의 해랑도까지, 도망가서 곱아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네 한 해 몇천 명이 그러니, 섬의 인구가 줄어 조정에서는 마침내 출국금지령****이 떨어졌네, 주민들이 뭍에 가서 이처..

사기를 읽는 밤/ 권갑하

사기를 읽는 밤 족보 권갑하 어머니는 족보를 하늘로 갖고 가셨다 도난당하거나 불에 탈지 모른다며 천칭좌 저울 밑에다 안전하게 숨기셨다 밤마다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 생애마저 하늘로 오르신 뒤 손주들 이름 새겨진 증보판이 나왔다 밤이면 불 밝히고 계보를 외는 어머니 아버지가 미리내 견우별로 깜빡이면 나는 또 밤하늘 향해 담뱃불을 당긴다 -전문(p. 8) -------------------- *『가온문학』 2022-여름(32)호 에서 * 권갑하/ 1958년 문경 출생, 문화콘텐츠학 박사, 1999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등단, 시조집『겨울 발해』등 다수. 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복장 터지는 날(부분)/ 강기옥

中 복장 터지는 날(부분) 강기옥/ 시인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前略) 복장腹臟은 불상佛像을 제작한 후 붓다의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빈 뱃속에 넣는 물목을 말한다. 가슴 부위의 후령통에는 붓다를 상징하는 사리, 소형 금불상, 불경, 발원문 등을 담고 흔들리지 않도록 공간을 솜이나 비단으로 가득 채운다. 그래야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불상이 된다. 1984년 7월에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동자상 복장품에서 2점의 발원문과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이 발견되었다. 첫 번째 발원문은 세조 12년(1466)에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 발원문은 1599년에 2구의 문수동자상과 16구의 나한상 등..

권두언 202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