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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當然)/ 김정웅

당연當然 김정웅 벚꽃 잎이 중력을 비껴 나갈 때 바람이 무심코 달빛을 향할 때 심장이 무거워집니다 잠시 놓쳤던 마음을 다시 잡았던가요 가로등 비추던 길이 벚꽃 그늘로 덮어지면 눈은 깊어만 갑니다 잊었던 색깔을 다시 구별할 수 있게 된 나는 더 이상 가벼운 약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들러 본 거리는 가벼움을 가장한 무게 있는 안부를 주머니에 넣어 주고 가던 당신 때문에 어제의 질량도 이미 평균보다 불어나 버렸습니다 손거스러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플까 봐, 건드리지 못하는 나약함이 누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하염없이 퇴적합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질긴 탯줄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깃털은 또 얼마나 무거울런지 가끔 문득이라고 적는 날은 탯줄이 잠시 끊어지곤 했습니다 기어이 라는 사실이 너무 무거워서 버티다 놓치려 ..

눈사람과 몽당비 외 1편/ 휘민

눈사람과 몽당비 외 1편 휘민 해거리하는 늙은 감나무에 눈송이 내려앉으면 온세상 잘 타 놓은 햇솜처럼 폭신폭신했지. 장독대의 금간 항아리들도 목련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서 온밤 내 뒤뜰이 봄 언덕처럼 환했네. 아침 되어 아버지는 눈을 쓸고 나는 아버지보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네. 그러나 너무 깨끗한 눈은 잘 뭉쳐지지 않았지. 내 안의 어둠과 아집, 치기를 밀어 넣은 뒤에야 몸통 하나 내주던 겨울. 내가 밟고 지나온 발자국마저 거두어 머리 올리고 아버지의 싸리비 꺾어 눈도 붙여 주었네. 오늘 밤 또 눈이 내리고 고향집 처마 밑에도 사박사박 하얀 어둠 쌓일 것이네. 밤새 조바심하다 새벽녘에 첫눈을 밟는 아이 이제는 없지만 아침 연기 흩어져 섣달 하늘에 스밀 때쯤 들릴 것이네. 싸르락싸르락 아버지의 비질..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 휘민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 휘민 장마로 흙탕물에 휩쓸렸던 백합들이 쓰레기가 뒤엉킨 덤불 속에서 시든 꽃술을 흔들고 있었다 개는 킁킁거리며 제 목줄을 잡아당기고 나는 무너진 화단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사이 늙은 개를 태운 유모차가 지나갔다 플래시를 깜박이며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진흙을 뒤집어 쓴 꽃의 얼굴로 슬픔이 내게 물었다 너는 취하지 않고 살 수 있니? 그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군락을 이룬 멸치들이 소나기처럼 몰려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사선으로 기울어지는 미끄러운 슬픔의 뼈대를 더듬어 보았다 (그사이 백합들은 제 목을 비틀어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내가 오랫동안 응시했던 빈 페이지의 적요를 넘기려는 듯 개의 목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어느새 흰빛은 사라지고 손..

명왕성 '134340' 외 1편/ 송시월

명왕성 '134340' 외 1편 송시월 거울의 심연 다중채널로 증식되는 너는 누구인가 표면 평균온도 섭씨 464도의 금성이 동쪽에서 뜬다 아름다운 고리로 나를 휘감으며 토성이 뜨고 지구보다 푸른 해왕성이 뜬다 에리스에게 막내 자리를 빼앗긴 소행성 서러운 명왕성(플루토)이 '134340'의 번호를 달고 뜬다 늦둥이의 배고픈 울음 설핏한 햇살의 품에서 설익은 끝물 사과 한 알 오빠들 꽃 편지 전달하기 위해 골목길 에둘러 구르고 구르는 종일 꽃잎 날리다가 빛살 빠져나간 허방 딛는 웜홀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라 분노하라 분노하라"* 나를 영사기처럼 풀어내는 저 어둠 벽, 돌멩이를 던지자 조각조각 피를 흘리는 내 서사 때로는 측은한 듯 실루엣 손으로 내 가슴에다 동심원 같은 파문을 그리며 사막의 낯선 구릉 ..

모래/ 송시월

모래 송시월 허스키하고 붉은 나의 음색을 먹겠다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벌나비들 달달하고 후끈한 귓바퀴에까지 앞다투어 앉는다 한국형 뮤지컬 넌버벌 난타 비리통 기침통 열꽃통 목쉰 노래통을 난도질한 나는 온몸이 부서져 사방으로 튀는 축축한 모래알 오버톤교에서 뛰어내린 50마리의 개들이 컹컹거리고 팽목항에 어린 꽃송이들 떨어지는 소리 뗏목을 끌고 먹물의 바다를 누비는 청년 예수 나를 막장에서 건져 올려 거울 앞에 세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엉켜 어지럽게 콜록거리는 회전목마 나도 너도 그도 아닌 내가 위아래 좌우로 빙글빙글 돈다 거울 속 햇살에 활활 타는 분서갱유, 예수와 붓다가 타고 공자와 노자가 타고 모래의 책과 모래의 여자가 타고, 아직 덜 씌어진 내가 탄다 모래알로 바스러진 나를 수도 없이 복제해 사구를 ..

고향, 잠/ 육호수

고향, 잠 육호수 거제도 능포 바닷가 옥수 교회 본당 나무로 된 둥근 강대상 안쪽 면엔 미당이문으로 열리고 닫히는 꽤 널찍한 수납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찬미 예수 1000 악보나 고장 난 마이크 케이블이나 오래된 설교 원고나 아주 오래된···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의 날짜가 적혀있는 주보 같은 것들이 들어있곤 했다 권사님들도 이곳은 잘 열어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이부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도 그곳에 들어가 몸을 말고 숨어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어떤 날엔 그러다 잠들어 깨어보니 주일 예배 한가운데 숨어있었다 찬송 소리가 모두 내게 오는 것 같은 어둠 속이었다 까마득히 나는, 오래전부터··· 말하자면, 이곳의 어둠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움이..

당연(當然)/ 김정웅

당연當然 김정웅 벚꽃 잎이 중력을 비껴 나갈 때 바람이 무심코 바람을 향할 때 심장이 무거워집니다 잠시 놓쳤던 마음을 다시 잡았던가요 가로등이 비추던 길이 벚꽃 그늘로 덮어지면 눈은 깊어만 갑니다 잊었던 색깔을 다시 구별할 수 있게 된 나는 더 이상 가벼운 약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들러 본 거라는 가벼움을 가장한 무게 있는 안부를 주머니에 넣어 주고 가던 당신 때문에 어제의 질량도 이미 평균보다 불어나 버렸습니다 손거스러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플까 봐, 건드리지 못하는 나약함이 누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하염없이 퇴적합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질긴 탯줄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깃털은 또 엄라나 무거울런지 가끔 문득이라고 적는 날은 탯줄이 잠시 끊어지곤 했습니다 기어이 라는 사실이 너무 무거워서 버티다 놓치려..

초여름 여우비/ 박은지

초여름 여우비 박은지 꿈이 사라진 지 몇 달 그런데도 아침이면 바닥이 축축하고, 꽉 쥔 주먹이 펴지지 않아 애를 먹어요 이제는 어쩐지 평범한 일 같지만 그래도 검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원통 안에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를 듣습니다 이 기계와 어울리는 멜로디를 찾기 위해 기계의 역사와 음악의 성능을 연구했을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원통 밖입니다 이제 곧 사진이 나올 것입니다 저도 가끔 하늘을 찍어요 별다른 것이 찍히지는 않지만 아니 또 그래서 하늘인 듯싶고요 "꿈이 고여 있는지는 안 보이네요 미세해서 찍히지 않은 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일단 좀 지켜봅시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염검사실을 나왔습니다 오는 길에 마을에서 가장 오..

세자 선정과 후왕의 즉위(부분)/ 강기옥

세자 선정과 후왕의 즉위(부분) 강기옥/ 본지 편집주간 왕의 죽음과 양위 임금이 죽음을 앞두고 숨을 고르면 임종臨終을 위해 세자와 대신이 자리를 지킨다. 임금이 숨을 거두기 전에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유언을 남기면 동석한 대신은 유교遺敎를 작성하여 정상적인 왕위의 계승을 공증하듯 기록한다. 왕이 승하하면 일단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눕히고 코밑과 입 사이의 오목한 인중人中 부위에 햇솜을 올려놓고 죽음을 확인한다. 즉 햇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알고 곡哭을 시작한다. 곡이 나면 내시는 왕이 평소 즐겨 입던 옷을 가지고 궁궐 지붕의 동쪽으로 돌라가 용마루의 중앙에서 왼손으로는 옷깃을, 오른손으로 옷의 허리 부분을 잡고 북쪽을 향해 '상위복上位復'을 세 번 외친 후 서쪽 지붕으로 내려온다. 동쪽은 ..

한 줄 노트 2023.11.29

면앙정가를 읽다 외 1편/ 조선의

면앙정가를 읽다 외 1편 조선의 떠다니는 소문처럼 말言이 앞설 때 사흘 밤낮 눈이 내렸다 읽고 싶은 문장을 접을 동안 부재를 확인하려는 듯 눈은 한 뼘씩 더 쌓였다 온통 흰색으로 지나온 길을 덮어 과거와 현재의 시차를 없애버렸다 한번 뿌리가 흔들린 정사政事는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기웃거린 표정들만 입속의 중얼거림으로 남고 시간의 갈 길에서 구차한 꼬리말들은 무른 혀끝으로 갈무리해야 했다 무방비로 노출된 외풍의 방향으로 중심이 기울었다 말라붙은 눈물을 향기로 치환하듯 시치미 뚝 떼고 꼬인 마음을 삼키고 말았다 은밀하게 비밀이 통하는 녹슨 자물쇠처럼 누군가 내 가슴속의 말을 꺼내려 할 때 다시 사흘 밤낮 눈이 내렸다 -전문(p. 36-37) * 면앙정가: 조선 중기 송순이 지은 가사. 관직에서 잠시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