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地藏
김윤
빗재 넘어
푸른 생강 밭 사이로 걸어가면
삼거리 커다란 소나무 아래
쉬는 듯 앉아서
올겨쌀과 엿을 파는 할머니가 있다
소쿠리 속 같은 대밭 안에
오래된 지장암이 있다
유리상자 안
작은 닫집 아래
금박을 입힌 관세음보살의
고혹적인 초록색 눈썹
삼거리에서 서쪽 길로 들어서면
지장보살이 지옥문같이 서 있을 거다
꽃 지고 바람 불고
저녁이 와서
두 손이 차다
내 손바닥에 무엇이 있을까
어떤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나를 들고
여기까지 걸어 온 일을
다 잊어버렸다
돌아서 내려가면
나루터가 있을까
-전문(p. 46-47)
해설> 한 문장: 김윤 시인의 시집 제목은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이다. 이 구절은 시 「지장地藏」에서 왔다. '지장'은 지장암에 있는 지장보살을 가리킨다.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을 다 건질 때까지 성불을 유예한 자비의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두루 살피고 헤아린다. 이 사실은 시인의 의식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시인은 지장암을 참배한 후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어떤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라고 명상한다. '시리다'라는 것은 기억에 대한 화자의 느낌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저녁은 차고 파랗다"라고 했다, 유사한 느낌의 표현이다. 지금까지 거쳐온 생의 궤적이 시리고 차갑게 느껴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시간의 여울을 건너왔기에 서늘한 촉각을 남긴다. 그리고 기억의 잔상을 다 추려낼 수 없기에, 말을 더듬거리듯 기억의 고리가 끊어진다. 그래도 그 기억에는 우리가 건져서 간직해야 할 소중한 알갱이들이 있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시인은 "맨발로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라고 했다. 차갑고 파란 시간의 강물에 굳이 맨발로 서서 과거의 기억을 돌아보는 것은 시간 속에 감추어진 사금砂金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빛나는 결정結晶을 얻어내지 못하면 우리의 생은 어둠에 갇히고 만다. 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생이 허무에 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p. 시 46-47/ 론 115-116) (이숭원/ 문학평론가 · 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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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에서/ 2023. 11. 20. <서정시학> 펴냄
* 김윤/ 전북 전주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지붕 위를 걷다』『전혀 다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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