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린 만다라▼
정끝별
눈이나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적 나도 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티벳 승려들은 돌을 갈아 그 가루를 물들여 그림을 그린다
갈수록 좁아지는 대롱에 색색이 돌가루를 넣어 대롱 한끝 한끝에 숨을 불어넣는다
가시인 듯 촉수인 듯
대롱 끝에서 피어나는 다반사의 만화경
거기서 누군가 울고 있다 나도 때때로 눈물로 그림을 그린다 죽어가는 엄마를 요양병원에 두고 올 적 엄마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 자주 와!
몇 명의 승려가 몇 날 며칠의 기도처럼 그려낸 그림은 그대로 쓸어 담겨 강물에 뿌려진다
돌가루에 숨을 불어, 없던 꽃을 피워냈으니
단숨에 쓸어, 없던 자리로 되돌려놓았으니, 그래 엄마!
눈이든 물이든 눈물이든
모래든 돌가루든 뼛가루든
고관절을 잃고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리는
오순이라는 오랜 이름의, 엄마가 그리는
-전문(p. 26-27)
♣ 시작노트
이별을 이별이라 믿어본 적이 없다. 이별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이별을 한다. 비밀을 기억하고 싶어서 이별을 기록한다. 기억에 억류된 비밀이 기억을 도망친다면 그건 너무 가난해지는 일, 기억이 사라지거나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그건 나를 다 잃는 일. 그러니 내 시는 이별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기억해야 할 때 나는 대나무숲을 찾는 이발사가 된다.
※ 제목 끝에 [▼] 표시가 된 작품은 시인들이 직접 뽑은 1~2년 내의 근작 대표시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시작품상 후보작으로 검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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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9월(405)호 <신작특집> 에서
*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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