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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3/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3 정숙자 당신은 애인들을 위하여 많은 태양을 갖고 계십니다. 마치 개울물과 호수를 위하여 수ᄆᆞᆭ은 달을 풀고 계신 것처럼. 저는 그 애인들과 태양을 질투에 들이지 아니합니다. 분배된 만큼의 빛만으로도 꽃 총총 열 수 있음을 어느 아침 매화가 귀띔해 주었습니다. (1990. 9. 20.) 멀리 보이는 산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에겐 카프ᄏᆞ와 칸트와 니체 같은 이름들의 봉우리 위로 피어오르고 지나가는 구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문/학은 대지를 빛내며 유유히 사유하는 강물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가끔 그 언덕을 따라 걸었지만, 끝ᄁᆞ지 가지는 못하고 바람에 옷깃을 맡기며 감동과 경외감만을 띄워 보낼 뿐이었습니다. 차츰 나이 들면서 그들의 의지는 그들이 뿜어낸 피요, 뼈라는 게 ..

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中 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창밖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저녁에는 내 방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탄생할지 내기를 했다 지혜는 뱀 은민이는 식충식물 사람을 고르는 쪽은 없었다 케이크의 초를 끄면 눈앞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하루 생일이 좋았다 내게 말을 거는 자를 적의 없이 바라볼 수 있어서 타인이 건네는 말을 덜 두려워할 수 있어서 코끝에는 연기 냄새 어두워진 세상에서 다들 제 몫의 접시를 쥐고 서 있다는 걸 안다 우리는 형광등을 켜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 숟가락을 들이대며 웃었다 케이크를 자르면 빈 공간이 커지고 날 부르는 목소리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해도 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 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기를 떠나가는 자가 눈에 남긴 발자국을 보며 ..

겨울 산/ 신달자

겨울 산 신달자 문이라는 문은 다 닫고 드는 길도 모두 지워 희고 큰 보자기로 산을 한 뭉치 싸 맨 것 같이 보인다 설산의 위엄으로 빛나는 오대산의 신전 같은 백덕산 저 하얀 보자기를 신이 달랑 들고 갈 것인가 신비는 근접하기 어렵지만 문 없는 저 안에 내가 있을까 나는 나를 찾아 눈이 쌓여 벌써 며칠째 길이 단절된 너무 하얘 공포스러운 은빛 보자기 속을 기어오른다 반쯤의 몸을 산에 내어 주다가 내친김에 온 몸을 산속으로 밀어 넣는데 거기 날 받은 손이 있을 것인데 무슨 일로 의기투합해 한 덩어리가 된 억세게 끌어당겨 더욱 하나가 될 밖에 없는 겨울 산 혹한 속엔 서로 앙칼진 포옹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다 얼어붙어 너도 나도 없는 내 발자국 소리까지 끌어 들여 얼음은 더 두꺼워지는데 시퍼렇게 날 선 바..

권두언 2023.12.21

드라마틱한 외 2편/ 하기정

드라마틱한 외 2편 하기정 세계는 점점 연출될 것이다 스크린과 휴대폰의 액정 안에서 허구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대본은 더 잘 읽힐 것이다 예견된 대화를 주고받고 끝날 때까지 예정된 시간을 견딜 것이다 수정 가능한 계획은 없고 갈등은 여전히 재구성될 것이다 카메라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주연이 될 것이다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그럴듯하게 연루된 사건은 패턴을 반복하고 리턴과 유턴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뻔한 장면에서 연인들은 서둘러 키스를 퍼붓고 반전은 연장전처럼 지루할 것이다 출연자는 늘고 관객은 모자랄 것이다 예정된 시간에 태어나 예정된 시간에 종료될 것이다 홍수가 일어날 것이다 사전은 찢기어 글자들이 지워질 것이다 대본은 다시 쓰여지고 누구나 알고 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2부가 시작될 것이다..

빈 문서/ 하기정

빈 문서 하기정 빈 문서의 커서는 깜빡이는 별처럼 아름다워 누울 자리를 봐 둔 사람처럼 기쁨이 넘치는군 죽을 자리를 정해 놓은 것처럼 안심이 되는군 유비무환이 가훈이었던 적 있었지 북어처럼 속을 다 내줄 준비를 하면서 근심이 있다면 속절없이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 맥락 없이 쏟아지는 빗물을 받아 마셔야 하는 것 활자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무기를 다 내려놓지 죽은 시계처럼 빈 문서는 미래의 첫눈처럼 뭉치면 던지겠다는 선전포고 아버지가 지은 집의 들창에는 혼자 뜨는 별 상량문에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들이 숨겨 놓은 빚 문서 영문도 모르고 어영차 어영차 들보를 메고서 이 집의 내력은 빚들의 산란 마루에 누워 올려다보면 이자가 별똥별처럼 쏟아져 내려 못 갚은 노래는 못갖춘마디처럼 궁강각치우 궁상각 궁상 내가 ..

'적(的)'에 관하여/ 권영해

'적的'에 관하여 ' 적'이라는 형태소가 좋아 보일 때가 있다 권영해 언젠가 출판 뒤풀이에서 K 소설가가 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엿들은 적이 있다 "시인은 '인간적'이라는 말보다 인간성은 개차반이라도 시를 잘 쓴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시인적'이어서 더 큰 칭찬일 수 있다" 그래 곰곰 생각해 보니 의욕보다 의욕적이 더 의욕이 있는 듯하고 고의보다 고의적이 더 고의 같다 극보다 극적이, 드라마보다 드라마틱(dramatic)이 비교적 더 실감난다 계산엔 젬병인 내가 계산적이기도 한 걸 생각하면 사이비似而非 같은 ' 적'은 아무 데나 갖다 붙여도 용서받을 것 같은 편리적, 두루뭉술적 접미사 여기가 바로 '합목적적合目的的'이든 불멍, 물멍, 숲멍······ 처럼 맹목적이든 ' 적'의 가치가 '적중的中'하는 ..

포돌스키 외 1편/ 김재홍

포돌스키 외 1편 김재홍 미니 월드컵이라는 유로 2008 B조 예선 1차전 폴란드 태생 독일인 포돌스키는 조국의 골네트를 향해 전반 19분과 후반 27분 각각 골을 쏘았다 통렬한 발리슛과 통한의 결승골 사이에서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독일 팬들은 '폴스카'를 외치며 환호했으나 한편에선 "독일은 폴란드인을 빌려 쓰고 있다"며 야유를 퍼부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뵈르테제 슈타디온에서 쏘아올린 외신은 한결같이 '골은 있었지만 세리머니는 없었다'고 했다 탯줄을 폴란드 남부 글리비체에 묻었고 아직 많은 가족과 친척들은 고국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 모두 가슴 한쪽에 뜨겁게 자리잡고 있으므로 23살 포돌스키는 웃을 수 없었다고 했다 폴란드는 1933년부터 75년 동안 단 한 번도 독일을 꺾지 못했고 독일은 2..

메히아*/ 김재홍

메히아* 김재홍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정부의 취업 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 야구장 타석에 섰다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광중석에 앉으면..

말의 무게 외 1편/ 이심훈

말의 무게 외 1편 이심훈 말을 많이 한 날은 소태 씹은 듯 입이 쓰겁다. 입술보다 먼저 마음이 나서서 온갖 너스레 떨었음을 몸이 안다. 겁 많은 개가 먼저 짖어댄다. 입가에 게거품 괴도록 앙살 부리며 사납게 짖어댄 개일수록 꼬리 사려 마루 밑 구석 찾아 제 발을 핥는다. 돼지두루치기 먹다가 깜짝 놀랐다. 부드럽게 양념으로 버무린 살코기 이가 시큰하도록 씹히는 오도독뼈 생각 없이 내뱉은 무수한 말들에도 혓바늘만 하게 돋은 어감의 차이로 세월 마디에 뼛조각들 섞여 있겠다. 씨앗과 말은 퍼지는 습성이 있다. 푸새들 씨앗은 익어 제풀에 퍼지고 사람들 말씨는 설익은 제멋으로 퍼져 선인장 가시로 어딘가 박혀 들쑤신다. 고작 100g 남짓 손전화를 내려놓은 주머니가 가볍다. 온종일 주고받은 말의 무게를 어림짐작으로..

플라스틱 난민/ 이심훈

플라스틱 난민 이심훈 너른 바다의 플라스틱 쓰레기 섬 다큐멘터리는 실화 영상기록물이다. 강렬한 햇살에 죽이 된 미세플라스틱 플랑크톤 물고기 바닷새 차례로 먹고 다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배달된다. 멸종위기종인 올리브각시바다거북이 떼죽음으로 해안으로 밀려오곤 했다. 새우나 해파리 대신 비닐 막으로 코팅된 플라시틱 조각들이 배 속에 널브러졌다. 나풀거리는 비닐쪼가리를 해파리로 알고 먹은 거북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비닐 탁구공 알을 해변 모래밭에 묻고 돌아가 오지 않는다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식당 갈 수 없어 배달되어 온 점심 한 끼니 비닐을 벗긴다.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 담아온 비닐봉지까지 사람마다 예닐곱 넘는 플라스틱 용기 앞의 식사 기도는 고작, 해파리보다 비닐이 더 많아질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