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날아간다
안이숲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뒤집어지면
가느다란 잎맥에 바닥이 드러난다
바닥의 눈가에는 밀물이
바닥의 이마에는 썰물이
철거되는 마른 잎에 샌드위치 판넬을 실은 여객선 한 척 표류하고 있다
길항하는 돛폭처럼 나는 자주 낮 꿈을 꾸었었지
어디가 가장 낮은 바닥일까
떠나려는 날개는 바닥에서부터 가벼워지고
더 가벼워지면 가을이었다
바닥이 되기 전에 바닥이 물고 늘어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
수평선을 밀어버릴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목수의 집으로 숨어버릴까
바람이 바닥의 틈새를 흔들고 간다
자, 날자.
지금부터 떨어지는 비상飛翔이 되어 보는 거야
저만치 바닥이 떠날 준비를 한다
다 버린 자세는 다 얻은 자세보다 가볍다
-전문(p. 98-99)
♣ 시작노트
한때는 어떻게든
사람에게 매달려 있고 싶은 날이 있었다
매달려 있어야 싱싱해지는 줄 알았다
실은 곪아가는 중이라는 걸 몰랐다
바람에 툭, 떨어져 보고서야 알았다
떨어진 자리가 얼마나 편안한지를
얼마나 별빛이 잘 보이는 자리인지를
바닥에서는 나무의 잔뼈까지 다 보인다
이곳에서는 벌레가 벌레 갉아먹는 소리마저 아늑하다
팔배개를 하고 드러눕기 좋은, 바닥에서
푸른 하늘을 본다.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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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9월(405)호 <신작특집> 에서
* 안이숲/ 2021년 『시사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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