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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종소리/ 김성춘

저녁 종소리 김성춘 누가 혼자 울고 있다 저물녘 호젓한 먼 산사에서 풀벌레처럼, 새소리처럼, 시냇물처럼, 노을이 지고 있는데 산도 숲도 숲속의 나도 희디흰 슬픔에 젖고 있는데 저물녘 호젓한 먼 산사에서 누가 혼자 울고 있다 꽃이 지고 있는데 -전문(p. 66) --------------------- * 수요시포럼 제20집 『쪼개진 빨강』에서/ 2023. 11. 20. 펴냄 * 김성춘/ 1974년 제1회『심상』신인상(박목월·박남수·김종길 공동 선)을 통해 등단, 시집『방어진 시편』『물소리 천사』외 다수

이건 바다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외 1편/ 정끝별

이건 바다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외 1편 정끝별 빙하가 녹아내리는 알래스카에서는 지느러미를 팔다리 삼아 기다란 송곳니를 지렛대 삼아 배밀이 구걸을 하듯 살 곳을 잃은 수십만 마리 무리가 해안가로 몰려든다 해안마저 발 디딜 틈이 없어지면 살기 위해 절벽을 오른다 한 몸 숨 쉴 곳을 찾아 기어오른다 그러나 더 기어오를 수 없는 벼랑 끝은 찰나의 유빙, 착시의 바다, 그때 허공에 허구의 날개를 펼친다 옥상에서, 난간에서, 팔다리를 펼치듯 절박이 절벽을 부르고 착각이 착란을 부른다 바위에 부딪쳐 내장이 터질 줄도 모르고 퍽퍽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줄지어 절벽을 오른다 빙하로 가는 길인 줄 알고 -전문(p. 48-49) ------------------- 그루밍 블루 무언가를 묻고 온 밤에는 꼭 계절을 묻게 된다..

모래는 뭐래?/ 정끝별

모래는 뭐래? 정끝별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 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전문- 해설> 한 문장: 만약 이 시에 하나의 질문만이 들어 있다면, 그 질문은 결정적인 질문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이 자꾸 늘어난다면, 그 어떤 질문도 결정적인 ..

여전히 나무는 나무 외 1편/ 김경성

여전히 나무는 나무 외 1편 김경성 느릅나무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톱날이 몇 번 지나가자 새집이 바닥에 떨어지며 새들의 가계가 허물어져 버린다 새들을 품었던 나무는 한 품이 되어 트럭에 실려 갔다 순식간에 집을 잃은 새들, 날아가지 않고 나무가 있던 허공을 맴돈다 톱밥이 되어 쌓여 있는 나무의 말들 바람이 휘감으며 읽는다 달의 잔향이 남아 있는 새벽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정령들의 발자국이 깊다 여전히 나무는 나무 새들이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 -전문(p. 84) ------------------- 모란의 저녁 물의 결이 겹겹이 쌓이는 저녁이 오고 있다 멀리 왔으니 조금 오래 머물고 싶다고 지친 어깨에 내려앉는 노을빛은 붉고 무창포 바다 왼쪽 옆구리에 쌓이는 모란의 결 누군가 마음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놓았는지 ..

우산/ 김경성

우산 김경성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한결같이 날개를 활짝 편, 새 한 마리씩 데리고 간다 저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떤 새는 숲으로 들어가고 어떤 새는 골목길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날지 못하는 새는 눈물 흘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날개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소한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젖어 있을 때만 날개를 펼 수 있는 새의 운명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날개 접은 새를 안고 버스 뒷자리에 앉는다 버스 문이 여닫혀도 놀라지 않고 부리로 무언가를 쓴다 모스부호 같은 것을 읽느라 내릴 곳을 놓쳐버린 나는 우음도 가는 사강 어디쯤에서 지도에도 없는 길 너머로 젖은 새를 날려 보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는 비..

검고 푸른 날 외 2편/ 황강록

검고 푸른 날들 외 2편 황강록 "이봐요, 귀여운 짐승! 이제는 잠을 깨요." 늦은 아침 넌 내게 그렇게 말했었지. 내 털들을 간질이던 차가운 공기, 눈꺼풀에 빛 무늬를 만들던 햇살로, 넌 그렇게 날 찾아왔었어. 난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창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너의 하얗고 긴 자취를 만났지. 너는 춤추듯 가볍게 내 방안을 걷고, 난 절반쯤 허공에 뜬 채, 밤의 먼지에 덮여 있던 책과 의자와 악기들이 웃는 것을 보았어. 사물들의 웃음, 그것들은 네 손끝이 닿을 때마다 그냥 거기 있다는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반짝거리기 시작했지. 네 머리카락의 물방울들은 내 어지럽던 밤의 꿈들을 씻어 내리고, 함부로 내딛는 두 다리는 놀이를 하고 싶은 꼬마의 충동 같았어. 넌 나와 사랑이라는 말도, 느낌도 없이 그토록 천진하게..

광장/ 황강록

광장 황강록 낡은 인간들이 새로 변한다. 우린 부스러진 더러운 깃털과 울음소리를 들었을 뿐, 어디선가 누군가의 자식들이 성의 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스팸 전화로 우린 짜증이 나 있지만 이 낡은 거리에 이렇게나 새가 많았던가? 우리는 이 새들의 이름을 알았나? 살아온 역사는?··· 광장엔 태극기들이 흩날리고, 목사는 스피커로 난해한 기도를 쩌렁쩌렁 외치고 있지만, 저 많은 새들은 날개가 있음에도 날아가려 하지 않고, 노래할 수 있음에도 노래하지 않고, 그저 과자 부스러기나 취객의 토사물을 찾아서 먼지처럼 우수수··· 광장의 이곳과 저곳을 돌아다닌다. 한 끼니의 절망과 분노가 편의점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지고 누군가의 자식들은 엄마, 아빠가 새로 변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도시 환경을 탓하고,..

시동인『미루』, 그 양양한 시의 벌판/ 문효치

미루, 그 양양한 시의 벌판 문효치 우리 시문학의 초창기는 동인지들이 우리 문학을 끌고 갔다. 일테면『창조』『폐허』『백조』『영대』『금성』『시인부락』『장미촌』등이 그것이다. 이들 동인지는 우리 문학인들의 중요한 활동무대였으며, 우리 문학을 이끌어가는 향도였다. 특히 시에서는 이러한 동인지들이 창작에너지의 근원지였으며 많은 시인이 이 에너지에 힘입어 시를 썼다. 동인지 활동의 장점은 잡지를 운영하는 편집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으며, 비슷한 시관을 가지고 공동의 문학적 지향을 향해 기상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등단지, 문단 연조, 작품 성향 등을 따지면서 필자를 선정하는 것이 대체로 문예지들이 보이는 청탁의 조건들인데 동인지에서는 그런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글을 쓰고 ..

권두언 2023.12.16

시동인『미루』의 창을 열며/ 하두자

미루의 창을 열며 하두자 이제 막 당도한 가을의 심장에 손을 쑤욱 집어넣고 가을을 휘저어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여기 일곱 명의 시인이 의기투합하여 시의 심장에 자신들을 쑤욱 집어넣고 시를 휘저어 보려 합니다. 각각의 시인들은 자신만의 시를 두 어깨에 걸쳐 메고 한순간의 쉼도 없이 터벅터벅 걸오온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미루'의 탄생을 알립니다. 뒤라스가 『고독한 글쓰기』에서 '쓴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은 비로소 소리 없이 울부짖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일곱 명의 시인들은 쓰되 설명하지 않고 말하되 공허하지 않고 침묵하되 거대한 메아리처럼 독자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시인들입니다 시가 때론 자연을 노래하고, 때론 서늘한 존..

권두언 2023.12.16

꽃으로 보니 꽃/ 강빛나

으로 선정됨     꽃으로 보니 꽃      강빛나    할머니 대신 열네 살에 물질을 갔을 때  한순간 태왁이 꽃으로 보인 적 있다   바다 잎사귀 위에 말갛게 피어 나 여기 있다는 듯  자맥질할 때마다 들썩이는 꽃의 엉덩이   파도가 시퍼렇게 허리를 밀어내면 꽃은 하염없이 수면으로 솟아올랐지만  할머니는 물밑의 바람을 따라가라고 몸속에 들어와 말했다   겁 없이 내리꽂히는 삼세기 살빛, 물계단을 건너 바다 한 귀퉁이를 퍼 올릴 때마다 꽃은 시들지 않으려고 몸을 흔들었다 설움은 절여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뒤집어볼 수 있는 생이 아니었다  수평선을 허리에 감고 고요하게 누워 세상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바다의 깊이가 겨우 한 뼘쯤으로 느껴질 때까지  해변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하얗게 늙을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