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저녁에 박하▼/ 정혜영

검지 정숙자 2023. 12. 9. 02:19

 

    저녁에 박하

 

    정혜영

 

 

  흰 커튼으로 무얼 가릴 수 있을까

  휘발된 아침이 돌아오면 처음인 듯 들어오는 빛

 

  그날 아침 얼굴은 너무 차가웠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나보다 나를 더 간섭하는 것

  새 연필, 새 노트,

  손대지 않으면서 자꾸만 새 것을 사고 있다

 

  우주 공간 어디선가

  네 목소리가 낯선 행성을 돌고 있다

 

  창을 열면

  박하 향이 공기 중에 머물다 가라진다

 

  날이 밝으면 사라지는 새벽노을,

  항상 곁에 있을 것만 같이 봄이면 푸른 들판에서 불쑥

  손 내미는 것들

 

  환한 대낮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별들은

  뭘까,

  몸을 가진다는 것은

 

  이 창백한 별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떤 나라를 알지

  우리가 가보지 않은 어떤 나라, 거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곳이지

 

  왜 우리는

  캄캄해져야 별을 볼 수 있을까

 

  이미 폭발했거나 거기 없더라도

  빗나간 시간을 건너와서, 지금

  막 우리 눈에 드는, 죽은 다음에더 캄캄하게 달릴 수 있는

  거기, 내 손을 얹는다

 

  네가 방란의 푸른 빛을 향해 달려가듯이

     -전문(p. 50-51)  

  

   ※ 제목 끝에 [] 표시가 된 작품은 시인들이 직접 뽑은 1~2년 내의 근작 대표시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시작품상 후보작으로 검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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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3-9월(405)호 <신작특집> 에서

  * 정혜영/ 2006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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