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맏형이니까/ 연제진

검지 정숙자 2024. 1. 25. 01:36

 

    맏형이니까

 

    연제진

 

 

  머리의 옆구리 달동네에 귀가 산다

  이목구비耳目口鼻로 구성된 얼굴

  서열은 귀가 맏형이지만 사실은 뒷방신세다

 

  눈엔 쌍꺼풀수술 눈썹문신에 매일 눈화장하고

  코는 중앙에 모시고 성형으로 오뚝하니 치켜세우며

  입술엔 하루에도 몇 번씩 립스틱 단장을 한다

 

  귀에도 귀고리나 피어스를 매달아 놓긴 하지만

  얼굴 무대 뒤쪽에서 고작 흔들거리는 백댄서 노릇이다

  구멍 뚫어 귀고리 매달고 떼고를 반복하니 고역이다

 

  얼굴엔 구석구석 화장을 하지만 귀화장은 없다

  게다가 귀에는 안경과 선글라스를 걸어두고

  요즘은 온종일 마스크까지 걸치니 영락없는 짐꾼이다

 

  귓속에서 스마트폰 블루투스 이어폰이 점멸하는 것을 보니

  귀가 몸살이 난 모양이다

  귀가 없었다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귀는 아우들 즐기는 무대에서 씬스틸러*가 될 생각은 없다

  다만 죽는 순간까지 청각 임무만은 사수한다, 맏형이니까

 

  언제 어디서나 숨은 일꾼 숨은 보석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전문(p. 86-87)

 

    * 씬스틸러(scen stealer): 뛰어난 연기력으로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배우를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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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온문학』 2023-봄(35)호 <시가 여무는 창>에서

   * 연제진/ 2014년『화백문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꽃잠』『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스크램블 교차로』, 공저『흔들리지 않는 섬』 등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