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외 1편
정리움
지상의 아내여
이곳은 사시사철 지지 않는 꽃이 핍니다
아무것도 흔들지 않는 바람이 붑니다
구름 위에서 눈처럼 날리는 밥을 먹습니다
지난여름 함께 갔던 나이아가라 폭포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동호의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다녀왔습니다
유진이의 늦은 하굣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많은 것이 있고 많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이 없습니다
나의 아내여
이제는 아프지 않습니다 편안합니다
조금은 잊어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바람이 불면
눈이 밥처럼 펄펄펄 날리면
그때 잠시 꺼내 보아도 좋겠습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전문(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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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달 씨
어머니 이름은 김상달이었다
원래 이름은 김상연이다
면서기가 한자를 잘못 기재해
상연相連은 상달相達이 되었다
連은 達이 되어
60년을 씩씩하게만 살다 간 상달 씨,
상연 씨가 되고 싶어 개명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개명 불가, 삶을 바꿀 수 없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 후에
개명이 쉬워졌다고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위패에도 김상달이 적혔다
"혹시 김상달 씨 계세요?"
죽은 사람을 찾는 전화를 받는 일은 흔치 않아서
옛 애인을 우연히 본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처럼 내리꽂혔다
김상달 씨 다음 차례입니다
김상달 씨 약 나왔어요
상달 씨를 상연이라 부른 사람은 단 한 사람
상달 씨의 남편이었다
한 줌의 재가 되어서도 찾을 수 없었던 이름
아버지가 그토록 찾아주고 싶어 했던 이름
어머니 이름은 김상연이다
-전문(p. 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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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나는 잘 있습니다』에서/ 2024. 1. 15. <문학의전당> 펴냄
* 정리움/ 경남 거제 출생, 2020년 『시에』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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