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역
신동호
노을이 비껴 앉아 있었다 거기에선
무료한 사람들의 세월이
떠나지도 도착하지도 않은 채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뭔가
내 청춘의 십 년은 내내
안개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던가
문득 옛 친구의 낯익은 얼굴을 만나고 돌아서면
비로소 기억 저편에 놓이던 추억
내내 앞만 보며 달리던 동안에도
묵묵히 세월과 더불어 낡아지던 풍경들
그 오랜 것들은 아름답던가 추억은
아련하다 새벽거리를 쓸던 이웃들의 얼굴도
나는, 머리를 쓰다듬던 그들의 손길로 자라지 않았던가
이내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이름으로 인해 소홀히 해서 안 되었을 것들
떠오른다 거기에선
홀로 돌아오는 어머니, 아들을 남겨두고
감옥 담장을 자꾸 되돌아보며 가슴 저미던 어머니
안개 속에 눈물 감추고
노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전문, 『저물 무렵』(문학동네, 1996)
▶물 안팎의 시공간을 부유하는 안개 독화讀畵(발췌) _금시아/ 시인
많은 역이 시인의 오브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춘천역」 하면 왜 방황하는 사랑과 고뇌들이 죽순처럼 올라올까? 춘천은 노을이 비껴 앉아 있는 청춘의 대명사다. 그곳에는 아직도 떠도는 청춘들이 "떠나지도 도착하지도 않은 채 안개 속에 잠겨 있"다. 잠긴 안개는 철창보다 더 단단해서 어떤 "청춘의 십 년"쯤은 우습게 옭아매기도 한다.
"내내 앞만 보며 달리"는 삶 하나하나를 스케치해 보면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낡고 오래된 것들이 보인다. "낡아지던 풍경들"은 노을 속에서 더욱더 "혁명"적으로 물든다. "소홀히 해서 안 되었을 것들"의 소중한 각오가 희미해지면, 「춘천역」 으로 간다. '가난한 대합실의' 뼛속 시리던 초심으로 깊이 심호흡한다. (p. 시 91/ 론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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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시詩 읽는 계절> 에서
* 금시아/ 2014년 『시와표현』 시 부문 & 2022년 『월간문학』 동화 부문 등단. 시집『입술을 줍다』『툭,의 녹취록』외, 산문집『뜻밖의 만남, Ana』, 시평집『안개는 사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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