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펜과 편지와 재즈 : 유경지

검지 정숙자 2024. 2. 10. 02:56

<청소년시>

 

    펜과 편지와 재즈

 

     유경지

 

 

  편지를 쓰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독한 소주를 마셨다. 너는 또 어디서 무얼 사랑하고 있으려나. 너는 또 어디서 어떤 것들을 천천히 풀어나가고 있으려나. 다시 자리에 앉아 펜을 고쳐 쥐고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상처 입은 것들을 구원하시나요.

  길 잃은 고양이들을 품에 안고 계시나요.

 

  홍차가 쓰길래 변기에 부어 물을 내렸다. 새벽에는 먼지가 죽어 시체를 남기는데 그것들은 모두 변기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나는 나체가 되어 다시금 책상에 앉았다. 펜촉의 잉크가 말라버려 또다시 잉크를 묻혔다.

 

  어떤 신화를 엿듣고 기록하고 계시나요.

  음식물 쓰레기나 나오지 않게 여전히 저녁 반찬을 두 가지만 올리나요

 

  찬바람이 불길래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침대로 파고 들어갔다. 옆집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가 거슬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책상의 스탠드에서 불빛이 어른거렸고, 편지를 쓰다 펜촉이 부러져 결국 편지를 버렸다.

 

  겨울에는 무엇을 하시나요.

  나의 이름을 아직도 발음하나요.

 

  쓰레기통에서 편지를 꺼내어 태웠다. 눈이 내리는 와중에도 불꽃은 피어 한 줄기 연기를 남겼다. 편지가 다 타기 전에 담배를 또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나는 연기가 되려나. 잉크가 아까웠다.

  간밤에 폭설이 내린 탓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담뱃재가 하나둘 떨어져 베란다 아래의 눈밭에 떨어져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보내지 못한 사랑을 마저 보내요.

  나는 담배를 좋아한답니다.

 

  편지를 모두 태우고 방으로 들어와 다시 책상에 고쳐 앉았다. 이번엔 부러지지 않게 만년필을 꺼내야지. 검붉은 잉크가 담긴 만년필을 조심히 꺼내다 고급지 위에 얹었다. 블루스가 듣고 싶었는데 아는 노래가 없어 재즈를 틀었다. 곧 크리스마스구나.

 

  상처 입은 것들을 구원하시나요.

 

  또 얼마간의 사랑이 반복되고

  또 얼마간의 담배가 태워지고 또 얼마간의 눈이 내렸다.

     -전문(p. 193-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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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詩魔』 2023-여름(16)호 <시마詩魔_학생> 에서

  * 유경지/ 청송여자고등학교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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