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기형도문학과 창작시 공모전 대상 수상작>
유언
김제이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이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필연을 깨는 평온한 세상으로 떠나겠다 선언하고는
허연 입술 사이
캄캄한 입속으로
담담히 걸어 들어갔다
기꺼이 삼켜지는 것들은 철저히 불태우는 것이 그가 떠난 잇속의 법칙이었다.
입이 바쁜 사람들은 그의 입속에 든 것을 맞추겠다
질긴 토론의 장을 열었으나
그의 입은 열리는 법이 없었고
그 시뻘건 골 속엔 식은 단어들만이
자유로이 떠돌다
꿀꺽
삼켜졌다
삼켜진 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명백한 불가사의가 되었다
투명한 단백질의 진물이 이 사이로 새어 나오도록
지치지도 않고 요란하게 열고 닫히는
틀니의, 고기가 되어
입과 입으로, 그만 영영 살아남고 말았다
그의 유언장은 불태워졌다.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이를 만난 일이 없다.
-전문(p. 304-305)
* 심사위원
예심: 이병률 시인_심사위원장, 고봉준_문학평론가, 박은지_시인
본심: 이광호 문학평론가_심사위원장, 이승하_시인, 이수명_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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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3-겨울(31)호 <2023 기형도문학과 창작시 공모전 대상 수상작>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