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과수원/ 이세진 오월의 과수원 이세진 수천만 마리 벌들 웅성거리며 이 꽃 저 꽃 속으로 종횡무진 달콤한 향기를 딸 때 나는 풍년을 기원하며 잡초를 뽑는다 멱살 잡고 당기듯 끙끙거리며 엎드려 잡아당기는 잡초 손에 푸른 물이 드는데 주위가 훤하다 심술궂은 바람이 옷깃 들추듯 나무 이파리 들추면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5
울지 못하는 시간들이 신발 앞에 서 있다/ 송진 울지 못하는 시간들이 신발 앞에 서 있다 송진 그가 바다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출입구를 빠져나간 건 오후 네 시 이십팔 분 그의 무릎까지 오는 검은 외투의 갈색단추는 포획할 목표물을 발견한 너구리처럼 그의 단단하고 굵은 손목의 푸른 정맥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꼬불거..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5
질서의 구조/ 조용미 질서의 구조 조용미 해바라기를 들여다본다 씨들은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다 나선형의 매혹은 흡 인력 때문인가 어떤 마음은 파고들고 어떤 마음은 빠져나오고 마는 앵무조개, 달팽이 껍질, 잠자리 날개, 솔방울, 어떤 나선은 그 애절함 탓에 다른 쪽으로 더 심하게 휘어진다 오..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5
시들의 기이한 교류/ 정우영 시들의 기이한 교류 정우영 발문 써야 할 문 아무개 형 시집 교정쇄와 내 시 원고뭉치를 한 달은 가방에 들고 다녔을 거예요. 도무지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한 날은, 작심하고 내 원고뭉치 꺼내 들었지요. 한숨 미리 뿜으며 손 좀 보려 했더니 어라, 시들이 그럭저럭 잘 자라 있는 거..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5
부러짐에 대하여/ 윤의섭 부러짐에 대하여 윤의섭 죽은 나무는 저항 없이 부러진다 물기가 사라질수록 견고해지고 가벼워지고 아마 죽음이란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일 것이다 무생물의 절단 이후는 대개 극단적이다 잘려나간 컵 손잡이는 웬만하면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 강철보다 무른 쇠가 오래 버티었다..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3
너와 나의 체온조절법/ 정채원 너와 나의 체온조절법 정채원 내 피를 얼려 만든 네가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내민다 검붉은 눈과 코와 이마 입을 벌릴 때마다 하얀 안개가 피어오른다 말과 말을 포개면 핏물이 흥건하고 포옹을 풀고 나면 셔츠는 피로 얼룩지겠지 뭉툭해지는 너의 얼굴 옆선을 더 깎아 칼날을 세운다 이..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3
항해자의 기도/ 문현미 항해자의 기도 문현미 깊고 푸른 바다에세 아름답게 피어날 꿈 하나 붙들고 부지런히 노를 저었습니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더 높은 세계를 향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을 기도의 불꽃을 밝히며 묵묵히 노를 저었습니다 거친 비바람 몰아치는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에도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0
적(敵)/ 나혜경 적(敵) 나혜경 한 사람 나가자 한 사람 들어온다 한 사람 목소리가 들리면 한 사람 방문 열지 않고 목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식탁에 같이 앉는 일 없이 후루룩 먹는 소리 사라지면 다시 쩝쩝 먹는 소리 시작된다 공기처럼 투명하니 서로 볼 수 없다 한 채씩 마련한 이불을 접었다 펴..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20
방부제/ 하린 방부제 하린 이혼을 했다 오늘부터 토막이다 상하기 전에 투명 봉지에 넣고 밀봉해줘 태연하게 웃으며 싱싱한 척을 했다 3일 내내 비린내가 진동했고 일요일엔 패배자를 위로하기 위해 전도사들이 왔다 제기랄, 혼자 해도 될 기도를 두 손 꼬옥 부여잡고 했다 냉장고엔 유통기한을, 기름..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9
내 인생의 책/ 이장욱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잤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