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에 밑줄 긋기/ 조명희 괄호에 밑줄 긋기 조명희 신호등이 빨갛게 달려든다 꽁무니에 속도위반을 매달고 달리는 차들과 친구의 사고 소식은 같은 속도였다 문장에 갇혀 살더니 결국 마침표 없이 끝나버린 한 행의 숨 모여든 사람들은 잠시, 옛사람의 건너편만을 짚을 뿐 물음표의 끝점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8
역사/ 허만하 역사 허만하 나는 드디어 멀리 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없어지는 것은 내가 아니다. 무수한 도시 가운데의 하나의 도시가 흔적 없이 사라 질 뿐이다. 그렇게 기록을 혐오하며 고요히 멸망한 이름 없는 왕조가 있다. 느닷 없이 쏟아진 한 줄기 소나기에 흠뻑 젖은 길바닥에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8
교실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장인수 교실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장인수 일어나기 무섭게 학교 가기 무섭게 밥 먹기 무섭게 학원 가기 무섭게 수업 끝나기 무섭게 방학하기 무섭게 '무섭게'가 와락 달려들었다. '죽도록'이 또 와락 달려들었다. 죽도록 공부하고 죽도록 운동하고 노래방 가서도 목 터져라 죽도록 노래 부르고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7
빈 박카스 병에 대한 명상/ 고영민 빈 박카스 병에 대한 명상 고영민 누가 떨어뜨렸는지 빈 박카스 병 하나 연신 버스 바닥을 굴러다닌다 왼쪽으로 커브를 틀면 도르르르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면 도르르르 왼쪽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면 도르르르 앞으로 급히 불려간다 좌석 없는 유일한 승객처럼 손잡이를 놓..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7
뒤란의 시간/ 박형준 뒤란의 시간 박형준 뒤뜰이라는 말을 고향에서는 뒤란이라고 불렀다. 그 뒤란 에는 대숲이 있고 감나무가 있고 그 감나무 아래 장독대들이 놓여 있었다. 그 뒤란에는 새 떼들이 먹으라고 사발에 흰 밥 알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장독대에서 퍼내는 것들은 구수 한 이야기가 되었다. 앞..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7
아우여, 사랑해!/ 김종해 <추모시> 아우여, 사랑해! 김종해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마포 신수동 현관을 나선다 절두산까지 걸어가는 동안 강변북로 옆에서 한강이 말없이 따라붙는다 절두산 부활의 집 아우가 나를 불러내지 않았지만 오늘 나는 초대받은 사람처럼 순례자처럼 가볍게 걸어간다 당인리 발전소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7
주사위 던지기/ 신해욱 주사위 던지기 신해욱 주사위의 내부에는 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 이런 방에서 하녀로 일하며 정성스레 걸레질을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 동생의 그릇은 너무 아름다워서 물밖에 담을 수가 없고 나의 사념은 산성액에 녹아 기포가 되어 올라오고 모서리는 모서리는 함..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2
불 먹은 용/ 전순영 불 먹은 용 전순영 타고 있다 먹빛 하늘 히말라야 산정에 매달린 용 한 마리 에베레스트 테시탐차 고개는 죽음의 고개 카라코담에서 인도, 네팔 히말라야 하늘에다 몸을 던져 씻고 또 씻고, 히말라야 넋과 칼춤을 추면서 때로는 골짜기에 떨어진 한 알의 먼지가 되어 바위와 결투를 하면..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2
사막으로 가는 문/ 김밝은 사막으로 가는 문 김밝은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노을과 나란히 보리수나무 그 끝으로 난 문을 열면 해를 가장 먼저 몸에 새겨 넣는 자이살메르, 꿈꾸는 성이 있다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모래알 같은 눈물 차오르게도 하는 오르페우스가 수금을 타는 그곳에선 갠지스강을 지나온 고요..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2
새/ 임승유 새 임승유 자작나무를 심었다. 자작나무 옆에 자작나무를 심고 하루 종일 심 다가 해가 넘어가면 다음 날 와서 심었다. 때리는 것 같았다.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그만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앉아서 울다가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한 후에는 자작나무 밖에..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