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부러짐에 대하여/ 윤의섭

검지 정숙자 2015. 7. 23. 00:19

 

 

      부러짐에 대하여

 

       윤의섭

 

 

  죽은 나무는 저항 없이 부러진다

  물기가 사라질수록 견고해지고 가벼워지고

  아마 죽음이란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일 것이다

  무생물의 절단 이후는 대개 극단적이다

  잘려나간 컵 손잡이는 웬만하면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

  강철보다 무른 쇠가 오래 버티었다면 순전히 운 때문이며

  용접 그 최후의 방편은 가장 강제적인 재생 쉽게 주어지지 않는 안

락사

  수평선 너머 부러진 바다와 구름 사이 조각난 낮달

  나는 네게서 얼마나 멀리 부러져 나온 기억일까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지만 대신 바람이 갈라지고 마는 걸

  편린의 날들은 사막으로 치닫는 중이다

  이쯤되면 버려졌다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부러질 때가 있었던 것이고

  서로의 단면은 상처이기 전에 폐쇄된 통로일 뿐이라고

  둘로 나뉘었으므로 생과 사의 길을 각자 나누어 가졌다고

  조금 더 고독해지고 조금 더 지독해진 거라고

  부러지고 부러져

  더는 부러질 일 없을 때까지 부러

  진 거라고

 

 

    * 『시사사』 2015. 7-8월호 <시사사 초대석>에서

    *  윤의섭/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후,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마계』등의 시집을 출간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다섯 번째 시집『묵시록』을 상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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