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의 기이한 교류
정우영
발문 써야 할 문 아무개 형 시집 교정쇄와 내 시 원고뭉치를 한 달은 가방에 들고 다녔을 거예요. 도무지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한 날은, 작심하고 내 원고뭉치 꺼내 들었지요. 한숨 미리 뿜으며 손 좀 보려 했더니 어라, 시들이 그럭저럭 잘 자라 있는 거예요. 내가 내 실력 얕잡아 봤는가 싶어 느긋이 들여다보았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내가 어려워하던 부분마다 어쩐지 내 것 같잖은 글자들이 슬몃슬몃 들어앉아 있는 거예요. 자못 곤혹스러워하다 문 아무개 형 교정쇄를 펼쳐 읽는데요. 형의 시들에서 여기저기 글자 몇 낱이 사라지고 없어요. 퍼뜩,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시들의 기이한 교류인가 생각했지요. 문 아무개 형 시들이 모자란 내 시를 메워주려 흔들흔들 건너왔다는 말씀이지요. 형의 냄새 밴 옷자락 걸친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지만, 마음만 받기로 했어요.
그럼에도 허허, 저저, 느긋한 숨가쁨이라니요. 형 아니라면 내가 또 이런 살핌 누구에게 받겠어요.
* 『문학의 오늘』 2015-여름호 <시>에서
* 정우영/ 1989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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