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막다른 골목/ 정우신

막다른 골목 정우신 당신과 걸었던 동네를 다시 걸어봅니다 미용실이 부동산으로 바뀌고 오토바이 핸들의 방향 담장 밑의 고양이들 고개가 축 늘어진 나뭇가지 여전한데 그때도 지금도 당신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느린 바람을 잘 맞이하는 사람 버려진 우산을 살펴보거나 머리를 다시 묶고 나비를 바라보네요 당신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나무 그늘을 들여다보듯 깊이를 재어보듯 휘날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읽은 간판이 없을 때 연인들은 눈을 감고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맹세하네요 나는 나뭇잎처럼 색을 바꿀 수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지만 당신과 나란히 날아보는 연습을 합니다 사거리 꽃집이 나타날 때까지 -전문(p. 182-183) ------------------ * 『포지션』 2022-여름(38)호 에서 * 정우신/ 2016..

감각/ 이제재

감각 이제재 그때 나는 이 층 베란다에 기대어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담배를 피운 적도 있고 새를 흉내 내는 휘파람을 작에 불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는 위를 쳐다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방학의 나는 기숙사 방에 혼자 있었고 옥상에서 지하 식당까지 그 건물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보고 걸어가는구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구나 여름이면 건물을 에워싼 나무의 잎이 무성했고 어떤 나무는 이 층과 삼 층 사이로 가지를 늘어뜨리곤 했습니다 손을 뻗어 잎사귀를 쥐었다 놓아주는 동안 매미들은 몸을 숨기고 함께 울었습니다 일 층의 휴게실에서 초록빛이 섞인 나무 그림자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복도에 늘어선 우산들이 말라가는 것을 보며 스물 언저리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

카오스_망델브로 집합/ 이시경

카오스 망델브로 집합 이시경 왜 세상이 활활 타오르는지 알 듯합니다 우리는 실수와 허수로 이루어진 우주 위의 한 점 숱한 점들이 회오리 속에서 반복될 때 모습이 드러납니다 끝없이 나타나는 징후들 당신의 몸이 온통 전갈의 꼬리로 뒤덮여 회오리치고 여기저기 무진장 많은 뱀이 똬리를 튼 채 혀를 날름거리고 낚싯바늘 같은 당신의 손이 빈 곳을 찾아 번득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이들의 잘못이 순전히 우리 탓인 것은 어느 부분을 확대해도 비슷한 양태가 반복되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속성을 수식 속에 숨겼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이곳에 남긴 숱한 점들 그 속에 있는 불꽃과 가시 돋친 절규들이 자녀들에게 거듭 나타나는 것은 무슨 은유입니까 저 몰려오는 먹구름 속에는 또 어떤 상징이 숨겨져 있습니까 뭇 ..

당연(當然)/ 김정웅

당연當然 김정웅 벚꽃 잎이 중력을 비껴 나갈 때 바람이 무심코 달빛을 향할 때 심장이 무거워집니다 잠시 놓쳤던 마음을 다시 잡았던가요 가로등 비추던 길이 벚꽃 그늘로 덮어지면 눈은 깊어만 갑니다 잊었던 색깔을 다시 구별할 수 있게 된 나는 더 이상 가벼운 약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들러 본 거리는 가벼움을 가장한 무게 있는 안부를 주머니에 넣어 주고 가던 당신 때문에 어제의 질량도 이미 평균보다 불어나 버렸습니다 손거스러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플까 봐, 건드리지 못하는 나약함이 누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하염없이 퇴적합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질긴 탯줄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깃털은 또 얼마나 무거울런지 가끔 문득이라고 적는 날은 탯줄이 잠시 끊어지곤 했습니다 기어이 라는 사실이 너무 무거워서 버티다 놓치려 ..

고향, 잠/ 육호수

고향, 잠 육호수 거제도 능포 바닷가 옥수 교회 본당 나무로 된 둥근 강대상 안쪽 면엔 미당이문으로 열리고 닫히는 꽤 널찍한 수납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찬미 예수 1000 악보나 고장 난 마이크 케이블이나 오래된 설교 원고나 아주 오래된···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의 날짜가 적혀있는 주보 같은 것들이 들어있곤 했다 권사님들도 이곳은 잘 열어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이부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도 그곳에 들어가 몸을 말고 숨어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어떤 날엔 그러다 잠들어 깨어보니 주일 예배 한가운데 숨어있었다 찬송 소리가 모두 내게 오는 것 같은 어둠 속이었다 까마득히 나는, 오래전부터··· 말하자면, 이곳의 어둠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움이..

당연(當然)/ 김정웅

당연當然 김정웅 벚꽃 잎이 중력을 비껴 나갈 때 바람이 무심코 바람을 향할 때 심장이 무거워집니다 잠시 놓쳤던 마음을 다시 잡았던가요 가로등이 비추던 길이 벚꽃 그늘로 덮어지면 눈은 깊어만 갑니다 잊었던 색깔을 다시 구별할 수 있게 된 나는 더 이상 가벼운 약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들러 본 거라는 가벼움을 가장한 무게 있는 안부를 주머니에 넣어 주고 가던 당신 때문에 어제의 질량도 이미 평균보다 불어나 버렸습니다 손거스러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플까 봐, 건드리지 못하는 나약함이 누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하염없이 퇴적합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질긴 탯줄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깃털은 또 엄라나 무거울런지 가끔 문득이라고 적는 날은 탯줄이 잠시 끊어지곤 했습니다 기어이 라는 사실이 너무 무거워서 버티다 놓치려..

초여름 여우비/ 박은지

초여름 여우비 박은지 꿈이 사라진 지 몇 달 그런데도 아침이면 바닥이 축축하고, 꽉 쥔 주먹이 펴지지 않아 애를 먹어요 이제는 어쩐지 평범한 일 같지만 그래도 검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원통 안에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를 듣습니다 이 기계와 어울리는 멜로디를 찾기 위해 기계의 역사와 음악의 성능을 연구했을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원통 밖입니다 이제 곧 사진이 나올 것입니다 저도 가끔 하늘을 찍어요 별다른 것이 찍히지는 않지만 아니 또 그래서 하늘인 듯싶고요 "꿈이 고여 있는지는 안 보이네요 미세해서 찍히지 않은 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일단 좀 지켜봅시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염검사실을 나왔습니다 오는 길에 마을에서 가장 오..

수렵채취의 기억/ 김원상

中 수렵채취의 기억 김원상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스웨덴의 박물학자 린네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생물 분류학으로 인간은 어디에 속할까요 시험에 나온다고 잊지 않으려고 외운 종, 속, 과, 문, 강, 문, 계,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책상에 고꾸라지던 아이, 가방 속에 책은 없고 이상한 공구들만 넣고 다니던 놈, 교실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며 어디론가 날아가 고래 사냥을 꿈꾸던 녀석,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챙겨 복도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쏜살같이 내달리던 친구, 그들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종, 뭐 이런 것이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요 린네에게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얻은 인류는 땅따먹기 놀이도 구슬치기 놀..

이오장_미학적 존재로 이해되는 시의 존재 의미···(발췌)/ 갈대 : 백옥선

갈대 백옥선 작은 씨앗 어두운 땅속 그늘은 한아름의 무거운 짐이다 세상 경계 저만치 보이는 틈새 세월 따라 푸른 잎 속 애벌레는 자라고 풍성하게 자란 이파리들 한여름 밤 이야기가 된다 산국 사이 귀뚜라미 울음도 성하거니 숨어 우는 바람 소리 아득도 하여 창공의 철새인 양 나도 따라 울어본다 가을 깊은 호숫가에 쓸쓸함이 피어올라 하이얀 갈대바람에 포자가 무진장 날리운다 -전문- ▶ 미학적 존재로 이해되는 시의 존재 의미는 예술성이다(발췌) _이오장/ 시인 · 문학평론가 세상에 갈대를 노래한 시는 많다. 역사 속에서도 많고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다. 왜 이렇게 시인들이 갈대를 노래할까. 갈대가 가진 이미지 때문이다. 고독의 대명사, 흔들림의 전설, 사람과의 인과관계, 생활의 필수품 등 갈대가 사람과 맺은 관..

달팽이는 밤을 건넌다 외 2편/ 김이담

달팽이는 밤을 건넌다 외 2편 김이담 자주 발을 멈추고 내 몸의 동굴에 나를 숨겨 밤을 건넌다 잠망경 같은 두 뿔을 세우면 덜컹거리는 바람의 창문들 이명으로 번뜩이는 소리, 소리들 불안은 끈적이는 점액으로 흘러내리고 어디선가 가시꽃으로 돋는 물방울의 향기 더듬더듬 혀끝에 닿는 길을 끌면 나를 베는 칼날 같은 풀잎들 죄어오는 허기를 핥으면 축축한 어둠이 끈적인다 목구멍에서는 컹컹 개 짖는 소리 또 어디에 나를 숨겨야 하나 빈 몸으로 무겁다 -전문(p. 21) ---------------------- 금계리에서 일박 골골골 물소리를 따다 갔더랬습니다 산 같던 사내의 병든 몸을 안고 살았다는, 더는 기도밖에 해 줄 것이 없던 그, 새처럼 날아간 텅 빈 하늘 뚫린 가슴만 빈 집으로 벗어놓고 떠났다는 마을은 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