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박형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박형준 어머니는 팔순을 내다보면서부터 손바닥으로 방을 닦는다 책상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 한쪽 손을 쭉 뻗어넣고 엎드린 채로 머리칼을 쓸어내오신다. 어머니의 머리칼은 하얗고 내 머리칼은 짧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것도 있다.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내도 방바닥에는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흔적이 떨어져 있다. 어머니는 먼지가 가득 묻은 머리칼 한 움큼을 뭉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지문이 다 닳아져 우리 둘 외의 다른 머리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다녀가실 때마다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슬픔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

거미의 암실/ 함기석

거미의 암실 함기석 활짝 핀 살구나무 가지에 노인이 목을 맸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노인의 귀에서 흘러나온 이상한 달빛에 우리 집은 빙산처럼 불타오르며 무너졌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밤마다 어머니는 맨드라미처럼 우셨다 누이는 연못의 물 위에 보름달을 그렸다 칼로 잘라 반쪽은 밤하늘에 걸어 놓고 반쪽은 아파하는 내 눈 속에 넣어 주었다 봄밤 내내 나팔꽃 속에서 아름다운 하모니카 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그 까아만 소리들의 상처부위를 소금으로 씻어 어머니는 아픈 밥을 안치고 누이는 살구나무 늑골 속에 해를 묻었다 처참하게 타죽은 어린 꽃들의 영혼을 묻고 젖은 내 눈동자를 묻고 구름과 함께 연못 속 달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어린 해바라기가 다가와 내 눈물을 씻어 주었다 노인의 생처럼 살구꽃이 지고 있었다 ..

북양항로(北洋航路) 외 1편/ 오세영

북양항로北洋航路 외 1편 오세영 엄동설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 극지를 항해하는 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 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낡은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예까지 왔다. 밖은 눈보라.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 목적지 미상, 항로는 이탈,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벽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서 어긋난 해도海圖 한 장을 손에 들고 난로의 불빛에 비춰보는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 -전문(p. 35-36) --------..

실종/ 김애숙

실종 김애숙 종로에서, 을지로에서, 퇴계로에서, 강남대로에서, 한강대로를 건너는 버스 안에서 무수히 파주, 남양주, 분당에서 강릉, 해운대 바닷가에서 광주 금남로, 대구 동성로에서 물 건너 제주에서 그리고 용산과 여의도에서 보았다 '우리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수십 년째 거리 거리를 헤매는, 안타깝게 외면하는 저 현수막 오늘은 우리 아파트 앞에서 가을비에 젖고 있다 -전문(p. 134-135)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김애숙/ 2001년 『문학예술』로 등단

그 집이 있다/ 임태성

그 집이 있다 임태성 아무리 멀리 갔어도 되돌아오던 집, 내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데 왜 이렇게 멀어졌나 지금은 쓸쓸해진 어머니의 집 어머니는 오늘도 동구 밖을 서성이고 있다 보고잡다, 말해 뭐하겠노, 눈물 나지 자식이 떠난 바다는 적막하다 전화는 기다리는 사람이 먼저 한다 딱히 할 말은 없다 고맙다, 막둥아, 건강해레이 자식들 전화 한 통은 귀하고 귀하다 밥이다 아무 것도 아닌데 배가 부르다 나 살아온 걸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고생한 기억은 사라져도 자식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그립다 바로 오늘이다 아들이 오는 날 저녁 해가 떨어지는데 동구 밖은 아직 조용하다 너무 일찍 준비한 밥상의 밥은 이미 식었다 지나가는 발소리가 모두 아들 같은데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달은 높이 떠서 마을 밖을 내..

숨바꼭질을 하고 싶었어/ 여한솔

숨바꼭질을 하고 싶었어 여한솔 식물원이나 숲엔 유령이 많을 것이다. 유령을 유리병에 모아 흔들면 예쁜 소리가 난다. 종소리나 모닥불을 만지는 것처럼 유령 하나가 버섯 사이에 누워 낮잠 자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하지만 유령을 볼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것 참 슬프군. 정수리 위로 참나무 그림자가 녹는다. 주말 아침이 너무 차가웠다 -전문(p. 132)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여한솔/ 2021년⟪매일신문⟫ 신춘문예로 시 부문 등단

자살은 병입니다/ 김태

자살은 병입니다 김태 '자살은 병입니다. 치료하세요.' 노인 자살률이 높아졌다며 막막해하는 보건소장에게 그런 현수막을 걸면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돌아오는데 '사는 맛이 있어야 살 거 아니에요?' 배웅하던 여성 계장이 푸념해서 돌아오는 내내 그 말이 뒤를 따라왔다 사람과 돈 다 곁에서 떠나버리면 사는 재미는 없고 병든 몸과 화만 남아서 남은 것은 바람 스미는 낡은 헛간 같지 않을까 사람과 돈, 사람과 돈, 사람과 돈 되뇌다보니 내가 예전에 뭔가를 동경했었다 싶은 기억이 부끄럽게 떠올랐다 사람과 돈이 아니어도 살아갈 만한 삶이 있다고 믿었는데 거기선 고독도 못난 일이 아니고 가난도 부끄러울 것 없어서 홀로 고요하고 평안한 삶! 사는 것이 그렇게 매끈할까, 젊음처럼 매끈할까 이를테면 밭의 잡초를 뽑으며 봄을 보..

프리지아 멜링꼴리아/ 전희진

프리지아 멜링꼴리아 전희진 프리지아를 사들고 오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꽃이 담긴 마켓봉지가 가벼웠어요 문득 꽃이 왜 가벼울까 풍선도 아닌데 그런 아득한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들은 그래서 병문안 갈 때 꽃을 사가는 것일까요? 가벼이 떨쳐내라고? 무거운 꽃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 따라나설 생각입니다 따라가서 발목에 샌드백처럼 내 양쪽 발에 노랗게 피어난 꽃을 달고 마음껏 달려보고 싶습니다 자꾸 가벼워지는 마음을 닻으로 가라앉히고 싶습니다 지금은 강변을 걷겠습니다 꽃을 보고도 꽃을 흔들며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을 보고 있는 나를 고양이가 가게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아요 눈에 뵈지 않는 고양이를 지울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고양이가 여기저기 똥을 싼다고 마시레야가 울상입니다 가지고 있던 걸 도난당하면 가벼워질까요..

용량 제한/ 김일태

용량 제한 김일태 잊히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넘어져 본 이들은 안다 잊는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다시 일어서 본 이들은 안다 잊힌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 자리 비워준 것이기에 잊지 않으면 잃은 게 아니다 나이 든 이들에게 오랜 기억보다 금방의 기억을 먼저 지우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초과 저장되어 넘치지 않도록 신은 우리의 머리 기억용량을 200기가바이트 정도로 제한해 두었다 -전문(p. 88)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김일태/ 1998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부처고기』외 8권, 시선집『주름의 힘』등

송기한_미메시스적인 뚜렷한 응시와···(발췌)/ 소금쟁이 : 박이도

소금쟁이 박이도 수면水面은 투명透明한 대리석大理石 조심스레 내려앉은 구름과 밀어대는 실바람에 두둥실 소금쟁이가 등장한다 가벼이, 날렵하게 춤추는 물 위의 춤꾼 수면에 미끄럼을 지치다가 돌연 허공을 훌쩍 넘어 뛰는 곡예사 수초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신기神奇 실바람 꽃바람 원무곡圓舞曲에 맞춰 빙글빙글 원무를 그리는 소금쟁이 -전문- ▶ 미메시스적인 뚜렷한 응시와 그로부터 피어나는 생생한 자연/-박이도의 시세계(발췌)_ 송기한/ 문학평론가 자연에 대한 섬세한 미메시스적 묘사는 인용 시에 이르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지금 화자는 고인물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소금쟁이를 유난히 응시한다. 미세한 관찰이 얻어내는 시적 의장이 이미지즘의 수법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그것이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근본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