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사기를 읽는 밤/ 권갑하

사기를 읽는 밤 족보 권갑하 어머니는 족보를 하늘로 갖고 가셨다 도난당하거나 불에 탈지 모른다며 천칭좌 저울 밑에다 안전하게 숨기셨다 밤마다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 생애마저 하늘로 오르신 뒤 손주들 이름 새겨진 증보판이 나왔다 밤이면 불 밝히고 계보를 외는 어머니 아버지가 미리내 견우별로 깜빡이면 나는 또 밤하늘 향해 담뱃불을 당긴다 -전문(p. 8) -------------------- *『가온문학』 2022-여름(32)호 에서 * 권갑하/ 1958년 문경 출생, 문화콘텐츠학 박사, 1999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등단, 시조집『겨울 발해』등 다수. 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이경철_모든 시와 시론을 섭렵한···(발췌)/ 진주 3 - 남강 : 강희근

진주 3    남강      강희근    천년이 강으로 흐르는 도시  물이 충혼의 언어로 시를 쓰고 있다  물에서 난 안개로 그림이 되거나 솟아 있는 산  억양이 된다    진주 사람들의 시는 한 줄로 유장하다  두 줄로 들어가는 물굽이에서 서사가 된다    촉석루는 달밤에 뜬 덩치 큰 배,  시를 한 줄씩 읊을 때 그 이랑에서 흔들 흐른다   물은 흘러서 천년을 이루고  성가퀴는 흐르는 물 찍어 전설을 쓴다   아, 진주는 전설이 다리를 놓고  의기사 단청으로 석류꽃 노을이 자욱이 붉다       -전문-   ▶ 모든 시와 시론을 섭렵한 참신하고 속 깊은 시 쓰기/   강희근 시인의 18번째 시집『파주기행』 (발췌) _이경철/ 문학평론가  시인이 평생 살아오고 지금도 그 문화를 보존하며 널리 알리고 ..

황치복_근원적 세계, 혹은 궁극적 삶과···(발췌)/ 2월의 달 : 김정임

2월의 달 김정임 온다, 온다, 그날에 동그라미 친 엄마의 달력은 달의 밥상처럼 환했다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고 거듭 붙잡았는데 후회는 아무리 해도 모자라지 뒷산 바위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은 끝내 열리지 않고 마지막 마음 어땠을까 웃음과 기다림도 없이 늙어가는 황매화와 바람에 흔들리는 빨랫줄 그 긴 날의 외로움을 알았으면서 담에 또 올게, 그 창가 자리, 흔들리는 당신을 남겨두고 길 잃은 것처럼 나는 어딜 헤매고 다닌 걸까 후회는 아무리 해도 모자라지 외로움 다 쏟아내고 더 외로운 하늘에 뜬 달처럼 2월에 떠나간 달 엄마, 안녕 -전문- ▶ 근원적 세계, 혹은 궁극적 삶과 신화적 상상력/ - 김정임 시인의 근작 시세계(발췌) _황치복/ 문학평론가 이승의 삶의 본질이 외로움이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고 덜어주는..

김성조_통합적 상상력과 '사랑'의 영원성(발췌)/ 혈혈단신이라는 말 : 이은봉

혈혈단신이라는 말 이은봉 혈혈단신이라는 말 마른 나뭇가지 위 덜렁 앉아 있는 까마귀 같다 마음속 가득가득 들린다 까마귀 울음소리 마른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은 혈혈단신이라는 말··· 보아주는 이 없어도 까마귀 한 마리 끝내 서방정토, 만들고 있다. -전문- ▶ 통합적 상상력과 '사랑'의 영원성(발췌) _김성조/ 시인, 문학평론가 '혈혈단신'은 현실적 시간 속에서 체감하는 자아인식의 한 형식이다. '까마귀, 까마귀 울음소리'는 이를 뒷받침하는 상징 이미지이다. "혈혈단신이라는 말"에서 '말'은 내부적/ 외부적 배경을 두루 함유한다. 이른바 스스로 인식하는 내적자아의 한 측면과, 외부적 시선을 통해 체감되어 오는 외적갈등의 한 기류가 그것이다. "마른 나뭇가지 위 덜렁 앉아 있는 까마귀"는 그 구체적 심리적 ..

김미연_일관하여 이룩한 저항과 국토정신···(발췌)/ 논개양-국토 6 : 조태일

論介孃 - 국토 6 조태일(1941-1999, 58세) 논개양은 내 첫사랑 논개양을 만나러 뛰어들었다. 초겨울 이른 새벽 촉석로 밑 모래밭에다 윗도리, 아랫도리, 내의 다 벗어던지고 내 첫사랑 논개양을 만나러 南江에 뛰어들었다. 논개양은 탈 없이 열렬했다. 내가 입 맞춘 금가락지로 두 손을 엮어 倭將을 부둥켜 안은 채 싸움도 끝나지 않고 숨결도 가빴다. 잘한다, 잘한다, 南江이 쪼개지도록 외치며 논개양의 혼 속을 헤엄쳐 다니는데, 물고기란 놈이 내 발가벗은 몸을 사알짝 건드렸다. 아마 그만 나가달라는 논개양의 전갈인가부다. 내 초겨울 감기를 걱정했나부다. 첫사랑 논개양을 그렇게 만나고 뛰어나왔다. 논개양을 간신히 만나고 뛰어나왔다. -전문- ▶일관하여 이룩한 저항과 국토정신의 현현懸懸/ - 혼과 육으로 ..

김미연_원석(原石)과 물꼬 트기의 시(발췌)/ 믿고 살기 : 정진규

믿고 살기 정진규(1939-2017, 78세) 진종일 문단속을 하고 살다가 허실수로 진종일 문을 열고 살아보았습니다 내 의심이 얼마 간 남아 있던 날은 그만큼 당하였으며 모든 의심을 털어버린 날은 전혀 당하지 않았습니다 내 뜨락의 풀잎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전문- ▶원석原石과 물꼬 트기의 시/ - 유한幽閒한 삶과 수유리水踰里(발췌) _김미연/ 시인 · 문학평론가 정진규 시인은 경기도 안성출생(1939-2017, 78세)으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월간 『현대시학』 주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시집에는 『마른 수수깡의 평화』 등 16권(육필시집 포함)과 시선집 『정진규 시선집』(2007, 책 만드는 집)이 있다. 그는 전봉..

돈 있으면 지옥이 더 좋다/ 임성순

돈 있으면 지옥이 더 좋다 임성순 천지에 이상하고 야릇한 향기가 진동한다. 색깔은 단색 모양도 크도 향기도 하나다. 아카시아꽃처럼 예쁘고 자극적인 향기이다. 나무들이 아침부터 힘차게 기지개를 켠다. 어젯밤 잘 잤느냐 콧소리를 섞어 윙크한다. 요즈음 지옥이 돈으로 도배되었다고 한다. 인간보다 지옥의 수문장들이 더 좋아한단다. 남에게 욕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큰손들이 뭉치뭉치 싸들고 투자하러 간단다. 천당이 빛을 잃어버리고 지옥이 대신 밝아졌다. 천당은 심심하고 거꾸로 지옥이 활력적이다. 야심이 가득한 놀이터로 리모델링했단다. 이승에서 돈 쓰지 말고 지옥으로 가지고 가자. -전문(p. 90) ------------------------ *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에서 * 임성순/ 20..

번진 자리를 따라가다가/ 김조민

번진 자리를 따라가다가 김조민 몰래 가져다 쓴 시간과 버린 시간의 저물녘 책갈피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밤 불쑥 튀어나오는 이름처럼 자꾸 펼쳐지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철새들은 그림자를 두고 날아오릅니다 아무도 좌절하지 않는 나머지입니다 반짝이던 첫 문장은 낡아져 이제 이렇다 할 단어는 몇 개 없습니다만 더욱 납작한 마침표입니다 영원히 쫓기는 환영 같은 것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뜨겁게 불타오르던 것들 모조리 거짓말이었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안과 밖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두었습니다 잘라내지 못한 것은 그대로 두기로 합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자꾸 뻗는 줄기처럼 늘어가는 빈 페이지에 인기척을 끼워둡니다 -전문(p. 58-59) ---------------------------- * 『미네르바』 202..

분리수거/ 최세라

분리수거 최세라 긴 장마가 시작되고 있는데 나는 담장에 등을 기댄 채 버려진 물건의 설명서를 읽는다 눈이 내리면 좋겠다 푹푹 꺼지는 발자국을 따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어제 일을 잃었는데 다시 그런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같은 시리얼 상자의 성분 분석표 위에서 장마가 시작되고 있다 날씨가 나빠지는 날엔 자기소개서 뭉치를 내다버렸다 종이는 종이대로 모으고 오른손이 비닐처럼 구겨지는 날에는 왼손을 버리고 인쇄된 글자들은 먹구름이 수거해 갔다 버려진 왼손이 종이처럼 젖었다 날씨가 좋아지면 산책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시집을 사야겠다 낡은 타이어 자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문(p. 52) ---------------------------- *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에서 ..

싱잉볼/ 강재남

싱잉볼 강재남 슬픈 노래는 여기까지 할게요 소리의 결정들은 흩어지기 바쁘고 다음이 없는 만남처럼 우리는 가뿐해요 작은 바람에도 소리는 파동을 만들죠 어떤 소리는 일생을 걸지 않아도 좋은 게 있어요 그 소리가 더 깊다는 걸 문득 알게 될 때 밖은 짧게 안은 동그랗게 스치듯 문지르기로 해요 공명은 힘이 센 모습으로 후렴구를 불러들이죠 가장자리는 지나치기로 합니다 자라나는 마음을 그대로 두는 게 좋겠군요 가볍게 간결하게 숨을 모아요 유연한 음률로 세상이 저물고 우리는 서로에게 흘러가고 있어요 우주로 퍼지는 음색이 보이나요 천천히 일렁이는 세상은 소리가 둥글고 납작해요 그러는 동안 어떤 꽃은 피고 또 질 거예요 희미한 음색처럼 가지를 뻗으며 점점 가지를 뻗으며 우리는 아름답지 않아서 간곡한 노래가 될 겁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