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각설탕과 베개/ 김륭

각설탕과 베개 김륭 가만히 끌어안아보는 베개가 갓난아기처럼 웃는 날이 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듯, 요양병원에 누워계신 당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나는 지금 당장 내가 우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려던 참입니다. 당신 없이 견뎌야 할 노후 걱정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가끔씩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씁니다. 갓난아기처럼 웃는 베개를 끌어안고 울었던 어느 밤으로부터 고아가 된 나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게 되었다고 투명인간처럼 밤을 걷습니다. 당신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잠을 썰고 있습니다. 한때의 달콤했던 잠을 딱딱하게 접은 각설탕처럼 앉아 입 안 가득 달이 쑨 죽을 머금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나의 베개가 된 것은, 나는 정말 내가 어디에 있는지 ..

깔/ 박순원

깔 박순원 깔은 깔이다 깔은 홀로 존재하며 깔깔거리지도 깔짝거리지도 않는다 깔은 깔로 존재할 뿐 고깔도 때깔도 아니다 빛깔이 깔이 되고자 하면 그 빛을 버려야 한다 깔은 아무것도 형용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깔은 소리가 되어 나오면 금세 허공에 흩어져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글자가 되어 나와도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여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칼이 소리나 글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나오면 누구나 그 칼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주의 깊게 살필 수밖에 없는 것과 사뭇 다르다 깔은 들리기는 하지만 형체가 없으며 보이기는 하지만 뜻을 알 수가 없어 빗댈 수도 견줄 수도 없다 맥락도 없고 덧붙일 것도 없다 -전문(p. 41) ---------------------------- *..

소리가 흘러가는 방향/ 고명자

소리가 흘러가는 방향 고명자 풀벌레가 쩌렁쩌렁 울어 무수히 별이 진다 갈참나무 둔덕 위 오로라는 엿볼 게 많아 손등을 꼬집어보았지만 꿈은 아니다 별의 발가락은 줄톱처럼 날카로웠다 손 내밀지 마라 가만가만 듣기만 하여라 평생 너의 머리맡을 맴돌 우주일 것이다 별은 제 몸에서 발아된 빛에 찔려가면서 비비적비비적 풀을 붙잡고 운다 누가 더 긴 울음을 지녔는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척이는 밤이다 바닥에 귀를 대면 돌아누워 하늘에 귀를 대면 천지간에 그림움인 듯 밤이 환하다 넝쿨덤불이 불 불 불 일어서는 폐허의 성 세입자인 나도 필경 몇 백 광년 전 별이었을 것이다 다시 몇 백 광년 잠들다 깨이면 더듬이와 다리가 길어지고 날개도 돋아있을 것이다 덤불이 사라진 곳까지 날다 겨드랑이를 쓱쓱 비벼대면 폐허의 세상이 노래..

장례식장에서/ 김상미

장례식장에서 김상미 이곳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는 장소 청춘도 있고, 노인도 있고, 아이도 있고, 중년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 미워했던 사람, 아무 의미 없던 사람 부자거나 가난했던 사람, 외롭거나 인기 많았던 사람 모두가 평등하게 훌훌 떠나는 장소 이승에서의 삶을 전부 끝내고 아주 멀리,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장소 곳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통곡 소리 저 울음이 멎으면 시간은 또다시 우리에게 속삭이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남은 자의 가슴에 쓰디쓴 맛을 지독한 화상 자국을 남기든 말든 죽음은 정작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도 모르리라 우리는 영정사진 앞에 흰 국화 한 송이 정성스레 바치며 잘 가시게, 잘 가시게, 명복을 빈다 그러곤 아직 살아남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일어나 나무와 하늘과 태양이..

차성환_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홀로와 창 : 장미도

홀로와 창 장미도 창의 연쇄가 쏟아지고 있다 쏟아지는 연쇄는 바깥으로부터 창을 밀어낸다 창은 바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으로 침몰하고 기후는 섬광을 만든다 바깥이 멀어진다 창이 있고 당신은 홀로 투명하다 형태를 갖추려 애쓰면 얼음 조각은 무섭게 녹아내리고 정육면체 안에 있다 당신은 정뮥면체 안에서 홀로를 잃어버리고 있다 상자를 접는다 손톱으로 모서리를 만들고 손바닥으로 면을 만진다 상자의 손길 때문에 창은 조금 더 오른쪽으로 기울고 고추에서는 오이의 맛이 토마토에서는 망고의 맛이 생긴다 당신은 식탁 대신 투명한 창을 펼치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빛나는 바깥에 밀려난 안쪽이 축적되는 것을 본다 창에서 쏟아지는 풍경은 일시적이다 잘린 손들이 입구를 연다 -전문- ▶ 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

차성환_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번뇌 : 나채형

번뇌 나채형 볼품없는 한 점 흙 부서지고 빚어지고 반복하는 지나온__생은 무엇이었을까 천 길 물 속으로 발길질 수 없이 했던 시간들 심연 뒤안 뜰 사이로 숨 한번 크게 쉬고 하늘을 바라보았어 거대한 붓끝의 썩은 냄새에 작은 생명들이 질식하고 밟힌 몽당연필 심지는 뿌리되어 꽃을 피웠지 -전문- ▶ 암흑물질의 시, 그리고 생명의 문(발췌) _차성환/ 시인 · 문학평론가 시「번뇌」는 생과 사를 무한히 반복하는 윤회에 놓인 존재에 대한 불교적 사유를 보여준다. 모든 생명은 죽으면 보잘것없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또다시 다른 생명의 옷을 입고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부서지고 빚어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윤회의 고리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지금 현재의 생뿐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의 전생前生들은 도대..

양말을 버렸어요/ 오연

양말을 버렸어요 오연 항상 돋아나 있는 엄지발톱 양말을 괴롭히는 부분은 언제나 같았어요 엄지발톱은 무뚝뚝하고 상냥하지 않아서 아무리 좋은 양말도 배겨내지 못했죠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 온 몸의 신경들이 아래로 몰려가요 뚫린 구멍으로 온 마음이 빠져 나가고 나는 다시 새로운 걸 채워야 해요 엄마는 전구에 양말을 씌운 채 심각한 얼굴로 예민한 수술을 하셨죠 잠자리 날개 같은 뒤꿈치는 동그란 천으로 입막음을 하였지만 구멍 난 마음은 동그라미를 따라 문밖을 나섰어요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자꾸만 가려워요 나이 든 언니들이 엄지발톱은 일자로 잘라야 한다고 왜 누누이 당부하였는지, 발톱은 두꺼워지고 단단해지고 왜 등이 굽어질까요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려 할까요 나는 신던 양말을 계속 신어서 양말에 구멍을 내요 서랍을 ..

너에게 가는 속도/ 이온겸

너에게 가는 속도      이온겸    어둠의 틈에서 비집고 나온다  빛나는 별무리 속으로 스며드는  초침이 귓속으로 밀려온다   공중에서 흩날리다 부서지는 모래알 같은  바닥의 흔적을 읽다 탑이 된 돌멩이 같은  몇천 겁의 계절을 지나 더 단단해지는 바위 같은  밤을 지나   새벽이슬을 먹을 때  재촉하지만  천천히 오라는 말,   너에게만 보이는 바람 되어  불어가고 있는     -전문-    ♣ 추천의 말  이온겸, 이 분을 시단의 새 식구로 추천한다.이 분은 오랜 기간 시와 함께하며 살아왔다. 읽고, 감상하고, 쓰기의 연속이 이 분의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온겸의 시는 아름다운 서정성이 빛난다. 단순한 듯하지만 복잡하고 진지한 내면의 세계를 새로운 모형으로 변형시키는 솜씨가 돋보인다. ..

이찬_우리 시대의 '사소 실존'과 알레고리-메타시'라는 특이점(발췌)/ 광명역에서 : 주영중

광명역에서 주영중 공룡의 뼈 안으로 도달한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공룡 꼬리처럼 영혼은 기억합니다 문상하러 가는 길 보이지 않는 스핀 사라진 빛으로 빛의 자식이 돌아간 시간 우울이 쌓아 올린 거대 철골 구조물 뭉개진 빛살이 몸을 감싼다 한때 수만의 빛이 나를 무너뜨리던 순간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 내리는 빛들 초록의 빛이 숲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표백된 표정으로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집으로 집으로 바람 불던 겨울 초입 눈 감은 두덩 위로 바알간 기운이 여명처럼 떠오를 때 칼끝에 잠시 머물다 가는 빛 조각 태초를 간직한 빛 조각에 발바닥까지 허물어질 때가 있었지 야음이 내린 역 눈이 멀 것 같은데 투명한 이물질이 흘러나오네 사랑의 광기에 발맞추던 달빛이 몸을 뚫고 지나가네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은 느닷없..

고래상어/ 나지환

고래상어 나지환 필리핀 오슬롭에서 고래상어 투어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지. 펍에서 한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자신은 고래상어를 세 마리 소유하고 있고, 네 번째 고래상어를 찾고 있다더라고. 음, 제가 보고 온 고래상어도 아저씨가 데리고 있는 애인가요? 그랬더니 아니래. 비유적인 의미라고 하더라고. 고래상어를 한 마리 가지고 있다는 건 합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거래. 투어를 운영하거나, 기념품을 교역하거나, 뭐 좆도 아닌 동전지갑 같은 거. 두 마리 가지고 있다는 건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단 뜻이래. 한국인 대상으로 렌트카 사기 친다든가. 공장 주재원 와서 심심하니까 자재를 빼돌려 판다든가. 그리고 세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좀 더 심각한 일들. 살인 교사. 마약 도매 같은 것들. 음, 그럼 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