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여우비
박은지
꿈이 사라진 지 몇 달
그런데도 아침이면 바닥이 축축하고, 꽉 쥔 주먹이 펴지지 않아 애를 먹어요 이제는 어쩐지 평범한 일 같지만
그래도 검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원통 안에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를 듣습니다 이 기계와 어울리는 멜로디를 찾기 위해 기계의 역사와 음악의 성능을 연구했을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원통 밖입니다
이제 곧 사진이 나올 것입니다
저도 가끔 하늘을 찍어요
별다른 것이 찍히지는 않지만
아니 또 그래서 하늘인 듯싶고요
"꿈이 고여 있는지는 안 보이네요 미세해서 찍히지 않은 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일단 좀 지켜봅시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염검사실을 나왔습니다
오는 길에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에 들렀습니다
입과 귀를 붙여놓았어요
밤새 나뭇잎 소리만 들으려고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듣다 숨을 후후 내뱉기도 하고요
침실 밖을 누군가 기웃거립니다
문을 열면 하얀 복도
꽃가루인 줄 알았는데 거대한 솜털이었습니다 아니 거대한 솜털 같았습니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쓰며 복도에 한 걸음 나갔을 때
마주치는 수많은 눈동자
나는 그들의 손을 꽉 붙들 수 밖에 없었어요
내가 보여? 눈으로 물으면 손을 맞잡아오고
함께 걸었습니다 마치 컨베이어벨트 위를 도는 것처럼
입과 귀가 없어도 좋은 우리들
땀 때문에 손이 미끄러질까 손깍지를 끼고 또 열심히 구르다 보니 이상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신나게 팔을 휘저으며 노래 부르고 싶다고, 그 커다란 원통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를 떠올릴 때
눈을 뜨면 바닥이 축축하고 발바닥이 욱신거리고
하늘을 찍어야지
하늘을 찍어야지
꽉 쥔 주먹을 펴고
고여 있던 꿈이 쏟아집니다
나무는 자라고요
여전히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전문(p. 1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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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22-여름(38)호 <POSITION · 4/ 신작시> 에서
* 박은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여름 상설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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