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향, 잠/ 육호수

검지 정숙자 2023. 12. 1. 03:10

 

    고향, 잠

 

     육호수

  

 

  거제도

  능포 바닷가

  옥수 교회 본당

  나무로 된 둥근 강대상 안쪽 면엔

  미당이문으로

  열리고

  닫히는

  꽤 널찍한 수납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찬미 예수 1000 악보나

  고장 난 마이크 케이블이나

  오래된 설교 원고나

  아주 오래된···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의 날짜가 적혀있는 주보 같은 것들이

  들어있곤 했다

  권사님들도 이곳은

  잘 열어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이부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도

  그곳에 들어가 몸을 말고 숨어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어떤 날엔 그러다 잠들어

  깨어보니

 

  주일 예배 한가운데

  숨어있었다

 

  찬송 소리가

  모두 내게 오는 것 같은

  어둠 속이었다

 

  까마득히 나는, 오래전부터··· 말하자면,

  이곳의 어둠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움이었지만

  익숙해서

  곧 다시 잠에 들었다

     -전문(p. 15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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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2022-여름(38)호 <POSITION · 4/ 신작시> 에서

  * 육호수/ 2016년 '대산문학상' 시 당선,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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