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이은지_ 미음과 리을 사이를 헤매며(발췌)/ 무성 : 구현우

무성     구현우    신은 좋은 마음과 좋은 몸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나는,  좋은 마음이 깃든 좋은 몸을 원했습니다.    신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만,  좋지 않은 마음을 담은 좋은 몸은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네 번의 전생이 그러했습니다.   신은 그러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은 얼굴입니다.  신에게도 표정이 있고  마음이 있다면요.   타인이 빌었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나와 가까운 타인 말입니다.   신은 그가 좋은 몸을 바랐고 일평생 병에 걸리지 않았으나  수시로  자해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몸의 문제입니까, 마음의 문제입니까?   신은 몸도 마음도 아닌 그의 문제라고 합니다.   신은,  나쁘지 않은 마음은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괜찮습..

시의 집/ 김월숙

시의 집     김월숙    숲을 찾아갑니다  학이 눈물을 흘린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느긋하신 노송 곁을 지나  구불구불 골짜기를 건너고  거친 숨 몰아가며 고개를 넘지만  학은 보이지가 않아요   북극성을 찾지 못하고  지도가 구겨지는 동안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비가 내립니다   참나무 사이에 정좌한 돌무덤을 지나고  너덜겅을 장악한 가시덩굴 휘돌아  빗물을 따라 흐르기로 합니다   두 날개로 작은 집을 감싼 학이 보입니다  정작 숲을 울리며 우는 건  젊은 시인이네요   스무 해 전에 헤어진 벗도  삶의 수련장을 펼치고  핵심 문제를 풀던 소년도 함께 울어요   잎 다 떨군 나무 기둥 사이로  강물처럼 출렁이는 어깨들이  천 년째 집을 짓고 있어요  눈물로 짓는 집이에요      -전문(p. 8..

두 번째 남자/ 한선자

두 번째 남자      한선자    한 남자가 카페로 들어선다  머리에는 제멋대로 자란 조팝꽃이 수북하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다   바다 한가운데 떨어졌다고  갑자기 수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지느러미를 키워 보고 있다고   드론을 수천 번 띄운다고  갑자기 하늘을 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날개를 달아 보기로 한다고   그러나, 삼십 몇 년 굳은 몸에 새싹이 돋는다는 것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뒤돌아보면, 굳은 몸에 새겨진 물결과 발자국들  어디 쉽게 버리겠는가   말쑥하게 차린 한 남자가 사무실 출구로 나가고  새로 태어난 두 번째 남자가 카페 입구로 들어선다     -전문(p. 59)   --------------------  * 『월간문학』 2024-2월(660)호 > ..

전영관_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웠던 날들(발췌)/ 플라시보 당신 : 천서봉

플라시보 당신      천서봉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 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못 읽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수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럼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발 다가서면  또 한발 도망간다던 당신 격정처럼 참 새카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전문,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2023. 문학동네)    ▶ 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웠던 날들(발췌)_전영관/ 시..

해무/ 김제욱

해무     김제욱    그림자로 가득한 컴컴한 새벽.  서해대교에 들어서자, 죽은 자의 입김이 물씬 풍긴다.   가려진 창문 뒤 유리알처럼 서 있는 사람들.  흰 입술이 표지판을 스치고 지나간다.   지난밤 꿈까지 속도를 매달고 따라와  짙은 안갯속을 헤집는다.   가려진 중앙선을 바라보며  상행선과 하행선의 의미를 되묻는다.  생으로 나부끼며,  안개에 가려진 난간의 몰락을 가늠한다.   이곳의 전망이란  동굴 속에서 빛을 찾는  믿음과 용기.  시선으로 쌓은 다짐.   식어가는 가슴으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아득한 동공  속도가 공포를 끈질기게 물고 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어둠이 펼친 입김의 흔적을 뒤쫓는다.   새벽빛이 내려오길 바라지만,  안개 낀 어둠은 여전히 ..

내 마음의 돌/ 김참

내 마음의 돌 김참 토요일 아침, 강변 돌밭에서 돌 하나 들고 보다가 내려놓는다. 다시 하나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강변엔 돌이 많다. 하얀 선 들어간 돌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구멍 숭숭 뚫린 돌도 들었다 내려놓는다. 흰 물새 한 마리 고요히 떠 있는 푸른 강과 돌 찾는 내가 돌아다니는 뜨거운 강변 돌밭. 서로 다른 세계 같다. 강변엔 돌이 많지만 내가 찾는 돌은 보이지 않는다. 9월의 태양은 여전히 뜨거워서 돌밭도 아직 뜨겁다. 삼을 한 바퀴 돌았는데 돌밭이 보이지 않는다. 섬을 빠져나오는데 절벽 아래 보이는 돌밭. 물놀이하는 아이들과 낚시꾼 두엇 보이지만 내려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잡목을 헤치며 비탈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니 마침내 나타나는 넓은 돌밭. 크고 작은 돌들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본다. 해..

격리의 격리/ 김정수

격리의 격리 김정수 통째 집이 이사할 것만 같은 오후입니다 반가움에 머물던 눈금이 급격히 당혹으로 기울자 저울을 벗어난 발은 캄캄해집니다 발이 하얀 모델은 앵글을 벗어나 영혼이 털리고요 어디에 초점을 맞추든 사물은 달라지지 않아요 느닷없는 사실만 울음 너머 쟁쟁합니다 전파를 회피해도 바람이 다 녹아내리는 듯합니다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방은 현관을 나서기도 전에 빠르게 변질되는 속성으로 쉽게 양비론에 빠집니다 동반 격리된 셔츠는 제대로 칩거에 들어갔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후통을 앓고 있는 규격 상자에서 빠져나온 지 벌써 40년째입니다 행동을 잃어버린 통증은 밀폐된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야 별들의 언저리에 가 닿습니다 세 번 격리되니까 이젠 익숙해졌어요 혼자가 아닌 둘 둘이 아닌 하나의 모면입니다 정적을 돌려..

김유조_찰나적 동선과 버려지는 물상에서···(발췌)/ 신발論 : 마경덕

中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전문(p. 201) ▶ 찰나적 동선과 버려지는 물상에서 찾은 객관적 상관물_마경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발췌)_ 김유조/ 소설가 마경덕 시인은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신발論」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년도 더 전에 나온 ..

물이 깊다/ 지연

물이 깊다 - 소룡골 시편 지연 * -니 에미는 땡볕에 대수리 잡으로 가서 그냥 칵 뒈져버렸는갑다 입맛 잃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물속을 헤매고 * 양재기에 염색약을 푼 어머니 몇 가닥 없는 아버지 머리카락을 칫솔로 곱게 빗어 내린다 앉은뱅이 의자에 아버지가 새침하다 * 빵빠레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다 주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임자 그만 일혀 * 아버지 돌아가시고 평생 함께하던 스탱 밥그릇이 없어졌다고 어머니는 어깨를 들썩였다 * 경로당에 쓰르라미로 달려가는 어머니 -전문(p. 196)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지연/ 2013년『시산맥』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2016년 《무등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건너와 빈칸으로』『내..

일반 병동의 저녁/ 정지윤

일반 병동의 저녁 정지윤 똑, 똑, 링거 방울 떨어진다 날카로운 소리들이 나를 찌른다 침대 밖으로 모르핀 같은 구름이 창을 가득 채운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맨발로 달려가는 햇살의 끝 몸을 뒤틀 때 묻어나는 아, 통증 없는 잠 매일 싸우다 흐릿해지는 나는 거울 뒤 다 보이는 버편의 환한 저녁을 왜곡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전염된 얼굴아, 울지 마라 빠져나가는 머리카락 한 올 -전문(p. 188-189)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정지윤/ 2015년 《경상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 201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 2014년 《창비 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당선, 시집『나는 뉴스보다 더 편파적이다』, 시조집『참치캔의 의족』『투명한 바리케이드』, 동시집『어..